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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트롱 Feb 09. 2017

영화 리뷰 <곡성> - 인생은 BCD, D

명작 돌아보기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가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노라


-누가복음 24장 37-39절




1.

 믿고 있던 사회의 저변 시스템이 제 기능을 못할 때, 홀로 서게 된 인간은 어떻게 움직이는가? 나홍진 감독의 전작 <추격자>와 <황해>가 그랬듯, <곡성> 역시 무능한 사회 위에 홀로 놓인 무력한 개인이 살아남기 위해 어떻게 발버둥 치게 되는가를 가만히 지켜보게끔 하는 영화다. 공권력인 경찰은 무능하고(애초에 주인공이 경찰이다), 병원은 의문의 질병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해 단 한 명의 환자도 살리지 못한다. 마지막 구원처가 되어야 할 종교는 ‘그것은 소문일 뿐이지 않느냐. 보지도 않고 어떻게 믿느냐?’며 교리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한심한 위로를 건넨다. 개인을 뒤에서 받쳐 줘야 할 사회 기본 시스템 3요소가 무너져 내린 지점에서 주인공 종구(곽도원)는 홀로 서게 된다. 어느 것도 믿지 못하는 상황 속에, 그는 경찰복을 벗어던지고 사적인 판단을 시작한다. 무엇을 믿어야 살 수 있을까....... ‘의심’을 하는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 종구는 경찰복을 입지 않는다


2.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인생은 BCD’라고 정의했다. 인생은 태어나(Birth) 죽음(Death)을 맞는 순간까지 끊임없는 선택(Choice)의 연속이란 뜻이다. 이 경구에는 한 가지 단어가 추가로 들어가도 괜찮을 듯싶다. ‘의심(Doubt)’이다. 선택의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의심’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인간의 삶은 태어나 죽는 순간까지 끊임없이 의심을 하고 선택을 하는 것의 연속이다. 한정된 정보 속에 사는 무지한 인간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뭣이 중헌 지도 모르면서 끊임없이 의심을 하고 한쪽을 선택해 나아갈 수밖에 없다. 그 끝에 어떤 결말이 기다리고 있을지 인간은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의도치 않게 ‘악’의 미끼를 물고 의도적인 악행을 저지르게 될지도 모른다. 모든 일에 핑계는 있다. 종구는 ‘그것은 내 딸이 아파서 그런 건데! 그것이 어떻게 잘못이냐!’며 정당함을 호소하지만 그것은 중한 게 아니다.


3.

 <곡성>은 이처럼 태생적으로 무지하고 나약하게 프로그래밍된 인간을 대상으로 한 신과 악마의 내기를 그리고 있다. 이 잔혹한 게임은 처음엔 의도치 않은 우연으로 시작한다. 불이 난 미친 여자네 집에서 종구는 일본인(쿠니무라 준)과 눈을 마주친다. 종구를 대상으로 한 게임은 이토록 우연찮게 시작된다. 종구가 의심을 시작하며 종구의 딸 효진(김환희)은 이상 행동을 보인다. 뼈가 가득 쌓이도록 물고기(물고기는 낚시의 목적이다)를 먹고 욕설을 내뱉는다. 이에 종구의 의심은 더욱 강해지고, 결국엔 ‘일본인을 잡아 죽인다’는 의도적 악행으로 이어진다. 의심되는 대상을 죽이려 하고, 결국 죽임으로써 미끼를 삼켜버린 종구는 마지막 순간 무명(천우희)을 만지고도 믿지 못한다. 종구 나름대로는 살아남기 위해 합리적인 의심과 최선의 선택을 한 것이지만,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의심과 선택이 최악의 결과를 낳는다. 악이 승리하고 곡성에는 악마가 강림한다. 악마는 만지고도 믿지 못한 종구와 그의 손을 잡은 무명을 비웃듯이 ‘나를 만져보라’며 가톨릭 부제 이삼(김도윤)을 조롱하고 껄껄 웃는다.

껄껄


4.

 절대자들의 이 무정한 내기는 비단 종구네 가족에게만 일어난 비극은 아닐 것이다. 영화 초반부 나온 인삼 키우는 조씨 집에 걸린 말라비틀어진 금어초, 엎어진 밥상, 소용없었을(오히려 역살을 불러왔을) 굿판 등은 영화 말미 비참한 최후를 맞은 종구네 집의 모습과 일치한다. 종구가 일본인을 차로 치여 죽이고 시체를 유기하는 순간, 일광(황정민)의 집에는 종구가 불고기 집에서 봤던 목에 두드러기가 난 여자가 앉아있다. 결국 이 내기는 오래도록 반복되고 있었고, 언제나 악마의 승리로 끝이 났으며, 미래에도 계속될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말라 비틀어진 금어초는 영화의 처음과 끝을 연결한다


5.

 우리 삶 속에는 수 없이 많은 미끼가 보이지 않는 낚싯줄에 걸린 채 우리를 유혹하고 있다. 그것이 미끼인 줄도 모르고 집어삼키면, 게임이 시작된다. 미끼를 문 것은 우연이지만 그로 인해 일어날 일들에 대한 의심과 선택, 그리고 결과에 대한 책임은 온전히 개인의 몫이다. “신이시여, 어찌하여 저희를 시험에 들게 하시나이까!” 곡성(哭‘聲)을 해보아도 현실의 신은 답이 없다. 영화 속에서 ’왜 이런 끔찍한 일이 우리 가족에게 일어나느냐’는 종구의 질문에 두 신에 가까운 존재들은 각기 다른 답을 해준다. 일광은 ‘던진 미끼를 물었을 뿐’이라고. 무명은 ‘남을 의심하고, 죽이려 하고, 죽였기 때문’이라고. 한쪽은 이유가 없다고, 또 한쪽은 이유가 있다고 말하지만 결국 둘 다 옳은 답을 해준 셈이다. 미끼를 물었기 때문에, 그리고 의심을 하고 악행을 저질렀기 때문에 종구는 비극을 맞이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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