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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트롱 Feb 06. 2017

영화 리뷰 <밀양> -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작 돌아보기



1.

 예수께서 말씀하시길,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 하느님은 그 햇볕을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마태복음 5장 44-45절).


2.

 성경에 따르면 세상은 불합리하다. 하느님은 빛을 내림에 있어 선인과 악인을 가리지 않는다 한다. 비를 내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를 가리지 않는다. 그는 만인에게 평등하다. 그러나 그 빛을 쬐고 비를 맞는 지상의 존재에게 있어 신의 평등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선인과 의인에게 상(빛)을 주고, 악인과 불의한 자에게는 벌(비)을 가해야 타당하지 않은가? 심지어 예수는 한 발 더 나아가 ‘원수를 사랑하고 너를 괴롭히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까지 요구한다. 그를 진심으로 믿고 따르는 자들도 이 지점에 이르면 멈칫하게 된다. 믿음만으로 실행하기는 매우 힘든 요구이기 때문이다.


3.

 세상은 불합리하다. 사실이다. 실제 주위를 둘러봤을 때, 빛을 쬐고 비를 맞는 일에 선과 악 구분은 의미 없어 보인다. 오히려 더 악한 자가 더 많은 빛을 쬐는 듯 보이기도 한다. 따라서 세상의 불합리함은 일종의 순리라고 말할 수 있겠다. 성경은 순리를 말했다. 그런데 반대로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은 순리에 어긋나는 요구다. 본인에게 사랑을 주는 자를 사랑하고, 해를 끼치는 자를 미워함이 인간의 본성이다. 더군다나 ‘원수’라 부를 정도면 그가 끼친 해가 너무나 막대한 정도일 것이다. 순리대로 흐르는 세상에 사는 이들에게 순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요구하니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하느님 자신은 순리대로 행동하면서 인간에게는 순리를 거스를 것을 요구하다니?


4.

 성경 가르침이 이리 모순적이니 영화 <밀양>의 신애(전도연)가 주의 가르침 앞에 괴로워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인 아들을 잃은 신애에게 종교는 구원으로 다가온다. 그녀는 상실의 고통을 달래기 위해 하느님을 믿고 의지하며, 성경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려 노력한다. 마침내 ‘원수를 사랑하라’는 초월적 가르침을 따르기로 결심한 그녀는 원수를 찾아 교도소로 향하지만, 도리어 그곳에서 잊고 있던 하느님의 공명 정대함을 만나고 만다. 하느님은 원수에게도 빛을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공평함은 신애에게는 무척 잔인한 진실이다. 신애는 삶의 욕구를 잃는다. 더 이상 그녀는 빛을 믿지 않는다.

신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고 법은 통쾌하지 않다


5.

 돌아보면 이 영화는 시작부터 잔인하다. 영화는 하늘에서 시작한다. 곧 유괴되어 죽음을 맞게 될 아이가 바라보는 하늘은 평화롭다. 영화에서 카메라가 잡아주는 하늘은 내내 파랗고 구름은 유유히 흘러간다. 하늘은 언제나 무심하다. 

영화의 시작 장면

하늘에서 시작된 영화는 땅에서 끝난다영화의 마지막 컷에서 비추는 땅은 질퍽거리는 검은 진흙이다아무렇게나 버려진 쓰레기도 눈에 들어온다너무나 질척이고 더러워서 도무지 밟고 싶지가 않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이게 세상이다. 인간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하늘은 무심하고, 인간이 밟고 있는 땅은 지저분하기 그지없다. 햇볕은 있다고 하는데 새삼 찾아보니 보이지 않는다. 도무지 살맛이 나지 않는 세상이다. 병원에서 퇴원하고 처음 찾아간 미용실의 미용사가 하필이면 원수의 딸인 경우도 있다. 세상에 구원은 없고 믿을 것은 오로지 나뿐인 것 같다. 신애는 집에서 스스로 머리를 깎는다.


6.

 삶은 결국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야 한다. 나의 괴로움을 남이 해소시켜주길 바래서는 안 된다. 괴로움을 준 이를 원망하고 저주하며 살아가서도 안 된다. 이 역시 방식은 다르지만 그에게 의존하며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온전히 자기 힘만으로 모든 일을 해결하고 괴로움을 견디려 해서도 안 된다. 지쳐 낙오하게 되는 길이다. 잠시 기대어 쉬어가는 정도는 괜찮다. 삶의 의존이 아니라 기대어 쉬어갈 수 있는 존재는 멀리 있지 않다. 우리 주변에 있다. 홀로 머리를 깎는 신애의 앞에서 거울을 들고 있어주는 종찬(송강호)처럼, 직접 머리를 깎아주지는 않더라도 거울을 들고 앞에 서 있어줄 사람 말이다. 


의지와 집념의 한국인, 종찬


7.

 다시, 마지막 장면으로 가보자. 신애의 떨어진 머리카락은 더럽고 질척한 땅으로 흘러간다. 그러나 그곳에는 햇볕이 깃들어 있다. 햇볕은 보이지 않을 때라도 언제나 우리 곁에 있다. 신이 내려주는 것이 아니다. 종찬처럼 곁에 있어주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밀양(密陽)이다.





★★★★☆






p.s) 영화의 원작은 이청준의 단편 소설 <벌레 이야기>(1985)다. 내용이 약간 다르다. 짧은 단편이니 쉽게 읽어볼 만하다.


p.s2) 전도연은 이 영화를 통해 2007년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p.s3) 영화 제목 '밀양'은 한자로 密陽인데 실제 도시 밀양과 한자가 같다. 하지만 실제 도시 밀양의 密은 '빽빽한'의 뜻인 반면, 본 영화에서는 '비밀'로 쓰였다(密 자체가 두 가지 뜻이 있다). 2016년 영화 <곡성>의 경우처럼 실제 지명 논란을 피하기 위함.


p.s4) 영화의 완성도 측면에서 굉장한 평가를 받는 영화. 한국 최고의 영화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p.s5)원래 신애를 꼬시기 위해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던 종찬은 신애가 종교를 버린 영화 말미에도 여전히 홀로 교회에 다니고 있다. 종찬은 신애의 상태를 보러 온 그녀의 동생에게 '안 나가면 섭섭하고 다니다 보니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기도 하다'라며 신애가 없음에도 여전히 교회를 나가는 이유를 말한다. 이는 종교에서 비록 구원을 얻지는 못할 지언정, 힘든 현실에 위안을 받을 수는 있음을 의미한다.



*과거 블로그에 포스팅했던 글을 재구성해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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