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계획이 틀어지는 것도 나름대로 매력이 있다.
2015년 4월9일 목요일
이번 여행의 첫 목적지였던 스페인 말라가에 가기 위해
나는 인천에서 출발한 대한항공 비행기를 타고 파리에서 내려 환승을 해야했다.
11시간 가까이 구겨진 몸을 추스르고 눈도 붙여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기내에서 날 찾는 승무원의 말 한마디를 들은 이후
내 여행은 첫날 스케줄부터 확.실.하.게. 꼬여버렸다.
내용인 즉슨...
파리 관제탑 파업으로 인해
예정되었던 말라가행 일정이 캔슬된 것이다.
허걱... 여행을 많이 해봤지만 이런 사유로 인해
여행지에 제때 도착을 못하는건 처음이었다.
파리 샤를드골 공항에는 같은 이유로 공항에서 발이 묶인 수많은 관광객들로 인산인해였다.
꼬인 여행일정에 짜증을 내야하는건지,
아니면 나같은 사람들을 보면서 위안을 받아야 하는건지 알수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다음날 같은 시각에
정상적으로 비행기가 뜬다는 소식을 접했고,
오늘은 항공사에서 정해준 호텔에서
하룻밤을 묵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현지 대한항공 직원의 도움으로
공항 근처의 4성급 호텔 바우처를 받았고,
다음날 오후 늦게까지는 좋으나 싫으나(!)
파리에서 한나절을 보내야했다.
오랜 비행과 예기치 않은 상황에 피곤했던 나는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뻗고야 말았다.
4월10일, 금요일
시차 때문에 오전 9시도 되지 않은 시각에
저절로 눈이 떠진다.
생각해보니 이 곳은 프랑스하고도 파리.
물론 이번 여행 여정에 포함된 곳이긴 하지만...
첫 목적지가 아니었기에
파리에 관해 어떤 준비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파리에서의 한나절이라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 내게 주어졌다.
무엇을 해야할까, 또 어디로 가야할까?
속마음 같아선 아무것도 안하고 호텔에서 뒹굴거리다가 막바로 공항으로 가고싶은데
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망할놈의 체크아웃 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
어찌됐든 난 오전 중에 이 호텔에서 나가야 하고,
오늘밤 비행기를 타기 전까지는
파리에서 뭘 하든 머물러야 한다.
남은 시간과 동선 등을 고려해봤을때
당일치기 파리여행을 하기 딱 좋은 장소는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바로 그곳, 에.펠.탑.
파리에 대한 로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에펠탑에 대한 지배적 이미지는 대략 이렇다.
뭉게구름이 둥실 떠있는 파란 하늘, 센강에 비친 햇살,
그 한가운데 우뚝 솟은 프랑스의 랜드마크.
나도 그런 에펠탑의 이미지를 갖고
프랑스를 방문했던 것이 사실이고,
그런 환상은 계속 갖고 있을만한 가치가 있다고 본다.
하지만, 프랑스의 봄날씨는 기온변화가 엄청나게 커서
맑은 4월의 오전은 여름처럼 따가운 햇살이 내리쬐고,
비오는 5월의 오후는 늦가을처럼 차가운 바람이 불어
감기걸리기 딱 좋다.
내가 갔던 4월 10일 파리에서는
하룻동안 사계절을 모두 겪었다.
시기적으로는 봄, 햇살은 여름, 분위기는 가을,
그리고 바람은 겨울.
여름햇살을 맞고 에펠탑이 보이는
샹드마르스 공원 한가운데 자리를 잡고
1시간 정도 누워 낮잠을 청한 뒤 다시 일어나
공원 주위를 두어바퀴 돌면서
봄꽃이 막 피어나는 나무를 품은 에펠탑,
먹구름에 둘러싸인 에펠탑,
갑자기 맑게 개어 파란 하늘을 머금고 있는
에펠탑의 모습을 볼수 있었다.
만일 계획대로 스페인에 먼저 도착했으면
결코 느끼지 못했을 에펠탑의 다양한 얼굴.
틀어진 계획에 짜증내고 신경이 곤두설 수도 있지만,
이것 역시 여행이 주는 새로운 묘미가 아니겠는가?
틀어진 일정의 크기만큼 내가 갖고 있던 여행의 시야도
그만큼 넓어진것 같아
마음 한켠이 뿌듯했고, 그만큼 행복했다.
이 날 이후... 정확히 한달 후인 5월 10일 일요일.
나는 다시 파리로 돌아와
잊지못할 프랑스 여행을 시작하게 된다.
먹구름이 걷힌 뒤 서서히 개이는 파리 하늘
그리고 에펠탑 전경_20150410
봄꽃이 흐드러지게 핀 4월의 에펠탑_201504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