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개 국어 하는 집안, 같은 소리 다른 뜻

아기 말문이 곧 트일 것 같다! 두근두근

by 장군

일주일치 밀린 이야기들을 브런치에 남기려고 노트북을 딱 열었는데, 잘 자고 있던 아기가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주섬주섬 노트북 충전기 돌돌 말고 노트북 딱 닫고 아기가 자고있는 2층으로 올라가려고 하는데 아기 울음 소리가 점차 작아지더니 결국 다시 잠든 모양이다. (잠귀 밝은 아빠가 옆에서 자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그냥 다시 글을 쓰기로 했다.




우리 가족은 영어를 사용하는 미국에 살고 있으면서, 남편은 스페인어가 모국어 (?라고 하나? 태어나긴 미국에서 태어나긴 했지만 스페인어가 first language이다), 나는 한국어가 모국어인 다문화 가정이다.

나는 2015년에 결혼한 이후로 남편의 부모님 집에 들어와 살고 있는데, 남편의 어머니께서는 미국에서 오래 살아오셔서 영어를 알아들으시긴 하지만 스페인어를 훨씬 편해 하시고 나는 여기저기서 주워듣고 또 대학교에서 스페인어 수업도 조금 들은 배경지식으로 스페인어를 알아듣기는 하지만 그래도 영어로 말하는게 스페인어보다 (당연히) 편하다.


그래서 시어머니와 내가 대화 할때마다 시어머니는 스페인어로 말하시고, 나는 영어로 말하지만, 둘이 서로 50-80% 정도는 알아듣는다. (100% 알아듣는것 까지의 갭을 채우기 위해 스페인어를 나름 공부 하려고 하지만 현실은 하루하루 로테이션 하랴, 집 와서 애기 보랴, 그날 그날 할일 쬐끔이라도 하랴 이 핑계 저 핑계로 바쁜 실정.)




미국으로 이민 와 가정을 꾸린 사람들 얘기를 들어보면 어렸을때부터 부모님이 편한 언어(mother tongue 이라고 하던가?)와 미국에서 살아가기에 필요한 언어, 영어 사이에서 이런 저런 크고 작은 고민들을 한 케이스들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1. 가까이 봤을 때 미국에서 태어난 사촌들의 경우가 있다. 고모와 고모부 두 분 다 한국분이시고, 아이들도 어렸을때부터 꾸준히 한국학교 나가면서 한국어를 접해왔다. 영어로 제 나이 수준보다도 글을 너무 잘 써서 어렸을때부터 여러 어른들을 놀래켜왔던 아이들이지만, 한국어로는 "엄마" "밥" "김치" "거미" 등 단어들 위주로 소통하거나, 영어 문맥에 한국어 단어를 가끔씩 넣어서 대화한다.


2. 그래도 미국에 초등학교때나 중학교때 즈음 온 친구들을 보면 영어도 거의 원어민 수준으로 구사 하고 (억양, 단어 선택 등) 한국어도 잘 듣고 쓰는 경우가 많다. 이민 오고 나서도 한국어 책이나 신문기사, 인터넷 사이트 등을 많이 접했느냐 안했느냐에 따라 한국어 어휘 수준이 확 달라지긴 하지만, 그래도 이정도면 이력서에 "fluent in written and spoken Korean" 이라고 자신있게 쓸 수 있는 정도이다.


3. 남편도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학교 가기 전, 어린이 시절에(?) 집안에서는 스페인어만 썼다고 한다. 학교 가기 전에 집에서 시어머니가 스페인어로 받아쓰기를 시키시는 등 스페인어 교육 위주로 시키셨다고 그런다.

남편이 초등학교 처음 다니기 시작하고나서 영어를 처음 접하고선 시어머니께 "엄마 그런데 학교에서 선생님 이상하게 말해." 라고 한적이 있다고 시어머니가 말씀해 주신 적이 있었다. 그래도 학교 다니기 시작한 지 1-2주일 만에 영어를 싹 다 배웠다고 한다. 부모님 참관일 등 시어머니가 학교에 가셔야 하는 행사가 있는 날이면 남편이 시어머니를 위해 영어/스페인어 통역을 해드렸다고 한다.


4. 미국에 온지 얼마 안 되었을때, 고등학교에서 타이완 계 미국인 친구를 한명 만났다. 수줍음이 많은 착한 친구였는데, 나중에 조금 친해지고서 이 친구가 말해준 사실에 "엥?" 했던 기억이 난다.

이 친구가 노는 무리에는 나를 포함해서 흔히 fob 이라고 불리는 동양계 이민자 친구들이 많았다. ("fresh off boat"의 줄임말로 원래는 이민자들을 비하하는 표현이었는데, 하도 많이 씌여서 비하하는 의미가 조금 퇴색된 것 같다. 다른 얘기이지만 Fresh Off the Boat이라는, 80-90년대 중국계 이민자들의 삶을 소재로 한 티비 드라마도 있는데 남편이 아주 재밌게 잘 본다.)

언젠가 이 친구와 서로 미국에서 태어났는지, 이민 왔는지 가볍기 얘기 할 기회가 있었는데, 알고보니 이 친구는 미국에서 태어났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렸을때 집에서 중국어만 써와서, 학교 들어가서는 이민자 아이들을 위한 ESL (English as Second Language) 반에서 영어를 따로 배워야 했다는 것. 중학교때까지인가 고등학교 1학년때까지인가 아무튼 이 ESL 반에서 수업을 들었다고 한 것 같다.

그런데 영어를 못했다기보다는 워낙 수줍음이 많은 친구라 말수가 적은것을 보고, 미국 정서로 봤을때 영어에 자신감이 없어서 말을 못한다고 생각하고선 ESL 반으로 편성을 한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15개월 가까이 되어가는 아기는 이제 말문을 트려고 하는지 반복적인 소리도 잘 내고, 소리도 잘 지르고, 어른들이 내는 말소리를 비슷하게 따라하기도 한다 (내가 "멍멍이" 하면 "멈머" 한다던지).


최대한 한국어 많이 들려주려 하며 집안에 있는, 한국어를 말하는 유일한 어른으로서 나름 책임감과 자부심을 가지고 (ㅋㅋ) 기회가 될때마다 한국어로 아기에게 말을 많이 하려고 노력 하는데, 그러는 와중에 몇 한국어 단어가 영어/스페인어로 듣기에 전혀 다른 의미가 된다는것을 깨달은 적이 몇 번 있다.


한국어로 "오이"는 영어로 "cucumber"

스페인어로 "hoy [오이]"는 영어로 "today"


한국어로 "할머니"는 영어로 "grandma"

근데 영어 "harmony"랑 비슷하게 들린다.


한국어로 아기에게 과자를 "까까"라고 부르지만

스페인어로 "caca [까까]"는 똥 ...

"아기야 까까 먹자!"는 남편이 듣기에 "let's eat poop"으로 들릴 것 ...


한국어로 뽀뽀는 영어로 "kiss"

스페인어나 영어로 "popo [뽀뽀]"는 똥 ...

"아기야 엄마한테 뽀뽀!"는 남편에게 어떻게 들리려나....??!?!?!!


또 영어와 스페인어 사이에서도 비슷한 경우가 있다.


영어로 "pie"는 한국어로 파이.

스페인어로 "pie [삐에]"는 발.

Polly's pie는 폴리의 파이 일까 폴리의 발 일까?




미국에서 결혼하고 아이 낳으신 베트남계 약사님께서는 동시에 여러 언어 가르치는게 아기에게 혼동을 줘서 안좋을수 있다고 그러셨다.

그런데 대학교때 들었던 교양 수업에서는 어려서 여러 언어를 접한 아이들의 지능이 한가지 언어만 접한 아이들보다 높다는 연구 결과들에 대해 배웠었다.


아기 생일때 즈음 (3개월 전) 소아과에 정기 검진 갔었는데, 의사선생님이 다음번 검진 때 까지 아기가 3-4 단어 정도를 말 해야한다고 그랬다. 어느새 다음번 정기 검진이 2주 뒤로 바짝 다가왔지만 아직 아기는 한 단어도 제대로 말하지 않고 있다.

조금 조급해져서 시어머니께 여쭈어보니, 시어머니는 아기가 로봇이 아니라며 의사선생님이 말하는 기간별로 딱딱 발달 상태가 정해지는건 아니라고, 걱정 하지 말고 아기가 자기 페이스 맞게 배우게끔 기다리는게 제일이라고 그러셨다.

그런데 듣고보니 그렇다. 걸음마도 다른집 아기들보다 조금 늦게 하나 싶더니, 처음 스스로 걷기 시작 한 그 다음날부터 뛰기 시작했었다.

왠지 말 하는것도 처음 한 단어 말하는건 조금 더딜지라도 한번 단어를 말 하고나면 그 다음엔 봇물 터지듯 한국어, 영어, 스페인어 단어들을 배우고 또 써먹고 하지 않을까?


아기가 혼자 못걸었을때는 "아 빨리 아기 혼자 걷는거 보고싶다" 했었지만, 막상 혼자 걷고 뛰는 아기 뒤를 좇느라 바쁜 엄마는 가끔 아기가 혼자서 안 돌아다녔을때가 그립곤 하다.

아기가 아직 말을 못하는 지금, "아 빨리 아기 말하는거 듣고싶다" 하다가도, 막상 아기가 한번 말 하기 시작해서 쉴새없이 떠들곤 하면, 지금을 그리워 하려나? ㅋㅋ



+제목 부분 배경 이미지는, 좀 뜬금 없긴 하지만 위키피디아 메인에 있는 언어지구본 모양을 스크린샷 해서 넣어봤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스스로 걷기 시작한 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