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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드 Sep 29. 2015

너무 오래 묵어 두었던 미안한 마음

두 번째이자 마지막 만남


어둠이 내려앉은 여름 초저녁, 나는 방 안에 누워 TV를 보고 있었다. 그때 친구 녀석이 방으로 뛰어 들어오며 호들갑을 떨었다. 앞 집 사는 ‘긴 머리 소녀’들이 지나갔다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동네는 돌산이라 불렀다. 실제로 이 동네는 돌산을 깎아 만든 마을이었다. 방 값이 주변보다 쌌기 때문에 돈 없는 많은 학생들이 이 마을에서 자취를 했다. 우리가 자취하는 방은 사람 하나 지나갈 정도의 좁은 골목을 두고 집들이 모여 있었다. 앞집에 사는 ‘긴 머리 소녀’들은 항상 우리와 다른 시간에 이 골목을 밟았다. 그때마다 우리는 창밖으로 소녀들을 훔쳐보곤 했었다.


그날도 친구 녀석은 이 소녀들이 지나갔다고 나에게 알람을 울렸다. 하지만 매번 긴 머리 휘날리며 대문 속으로 사라지는 그녀들의 뒷모습을 보기엔 지금 TV에 나오는 장면이 너무 희귀하고 놓치기 아까운 장면들이 이어졌다(당시 V외화가 처음으로 방영된 날이었다). 조금 시간이 지났을까, 친구 녀석이 다시 벌떡 일어나서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러더니 소녀들이 카세트를 들고 돌산 쪽으로 산책을 나가는 것 같다고 말했다. 나는 통기타를 집어 들고 친구와 함께 방을 나섰다.


어둠에 숨어 있던 돌산이 밤하늘에 어스름한 형체를 드러냈다. 어디선가 음악 소리가 작게 들려오기 시작했고, 소녀들의 웃음소리가 묻어 나왔다. 가까이 다가가니 자기들끼리 춤을 추다가 놀란 듯 서 있었다. 당황스러웠던 모양이다.

평평한 돌 하나를 골라 친구와 걸터앉았다. 그리고 기타를 치면서 말을 건넸다. “우리는 매일 밤 창밖을 보는 게 낙이었습니다. 항상 긴 머리 소녀들이 지나가기 때문입니다. 차마 숨소리가 들릴까 조심하며 창밖을 보았고, 그 시간은 너무도 짧았습니다. 오늘 이렇게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건 후회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그 어느 때보다 컸기 때문입니다” 어느 대목이 웃겼는지 소녀들은 웃었고, 우리는 어느 학교냐, 몇 살이냐 등의 이야기로 짧은 인연을 만들었다.


최근, 알게 된 친구 중에 ‘나랑 참 많이 닮았다’라는 생각을 갖게 된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갑자기  오래전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돌산에 앉은 우리는 두 번째이자 마지막 밤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약속이나 한 듯이 우리는 다음을 기약하지 않았다. 다음날, 오랜만에 본가에 가기 위해 직행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버스를 타기 위해 많은 학생들이 길게 줄을 서고 있었다. 그 행렬 중에 아는 친구들을 만났다. 앞 줄에 여학생 몇 명이 재잘 거리며 서 있었다. 나는 그 여학생들에게 말을 걸으며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와 대화를 나누던 여학생의 시선을 따라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다. 내 뒤 행렬 속에 그 긴 머리 소녀가 있었다. 


버스가 도착했고 나는 친구들과 버스 맨 뒤로 몸을 숨겼다. 내가 내릴 곳은 종착지가 아닌 중간이었다. 당시 버스는 앞문으로 타고 앞문으로 내리는 구조였다. 내가 내릴 때, 사람이 많아서 긴 머리 소녀를 안 보고 내리길 바랐다. 하지만 앞문에 도착하니 긴 머리 소녀는 창밖을 내다보며 서 있었다. 그렇게 그녀의 등 뒤를 스치고 지난 세월이 20년이 훌쩍 넘었다.


나를 닮았던 그 친구의 나이를 보니 서너 해는 더 어렸다. 천만, 만만 다행이었다. 긴 머리 소녀는 지금까지 이름도, 얼굴도 모르고 기억의 조각으로만 존재하고 있는 사람이다. 25년이 지나서야 미안하다는 말조차도 못할 미안한 마음을 주소 없이 보내게 되었다.


(기억에 의존해서 써 내려간 글이라 사실과 다른 부분도 있을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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