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집에서 홀로 외롭게 성장한 나는 늘 모든 걸 혼자서 해결해야 한다는 강박이 자리 잡았다. 항상 남들보다 두 배, 세 배 움직여야 열악했던 삶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고, 남들보다 더 빨리 뛰어야 그들과 속도를 맞출 수 있었다.
‘동물의 왕국’이라는 프로에서 가끔 미어캣이 고개를 내밀고 주변을 경계하는 모습을 볼 때가 있다. 그 모습은 귀엽기도 하고 재밌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그 모습을 볼 때마다 마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 편치 않을 때가 있었다. 혹시 내가 저렇게 긴장과 경계를 하고 있는 건 아닌가 싶었다. 그러면서도 그런 미어캣이 부러운 게 있었다. 그들은 항상 함께 의지할 동료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홀로 자란 나는 부모의 손길이란 것, 형제라는 것을 모르고 혼자 자랐다. 그래서 우화 속 콩쥐는 하늘이 점지해 준 미래의 내 부인일 것이란 생각도 했었다.
지금 나는 뛰는 것이 습관화되었고, 긴장하며 주변을 경계하는 것이 삶이 되었다. 세상을 저항하며 지내 온 마찰들이 열처리된 강인한 것이라 생각했다. 덕분에 자신을 분노와 회피로 보호하며 조급함과 경계심을 키웠다.
2013년 늦은 봄, 몸이 이제 그만하자고 주저앉았다. 1년 넘게 주저앉은 나에게 채찍도 들었다. 때로는 당근도 주며 다시 뛸 것을 강요했다. 지금 직면하고 있는 세상 일이 그동안 헤쳐 온 일들보다 뭐가 그리 힘든 것이었냐고 윽박을 질렀다. 자신도 스스로 일으켜 보려 애를 썼지만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한두 달이 지나고 힘들어하는 자신과 마주 앉아 대화를 시작했다. 하지만 마주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대화 속에서 겹겹이 쌓였던 일들, 긴 세월 동안 조급하게 강요했던 일들이 그동안 내 자신을 얼마나 숨 막히게 했던 일들이었는지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했다.
숨을 조금씩 고르기로 했다. 이젠 미어캣처럼 함께 망을 봐줄 동료들이 있고, 노을이 물들면 아름답다고 말해 줄 가족들, 이웃들이 있지 않은가. 지난 삶의 길목 어디에 지쳐 있을 내 자신이 힘을 내고 다가와 주기를 바란다. 함께 걸어갈 수 있도록 기다려 보기로 했다. 천천히 걷는 연습을 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