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는 고정된 신념과 가치관을 가질 수 있을까. 사람이 절대적 진리가 있어야 문제없는 삶을 살고 정합성 있게 살아가는 것일까.
나는 최근에 어떤 텍스트를 보거나 의견을 나눌 때 그것이 진리인지 아닌지 논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그렇다고 불가지론자, 다원주의론자도 아니다. 다만, 진리는 불변의 고정된 것이 아니라고 여기는 편이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진리’라고 생각했던 것이 한 순간에 깨져버렸던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그런 경험을 통해 ‘진리’는 ‘허상’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어떤 평가나 사실에 대해 날을 세우기도 한다. 이는 나에게 견고하게 굳어 있는 어떤 가치와 철학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게 모순이라 생각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또한 변화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이번에 정리한 파르메니데스의 사상은 앞으로 나의 판단에 넓은 기준으로 작용할 것이다. 다음은 팟캐스트 '지대넓얕'에서 나온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있다’의 길은 있지 않을 수 없다. 반드시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무엇이다. 그렇다면, ‘있지 않다’는 것은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관념적으로 떠 오르는 심상은 과연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것인가.
‘있는 것’은 우리가 의미 있게 사유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없는 것’은 사유하거나 표현이 불가능하다. 사람들은 눈이나 귀 등 오감으로 느끼는 것으로만 ‘있는 것’을 판단하기 때문에 ‘있는 것’과 ‘없는 것’을 혼동한다. 따라서 진리를 탐구하려 한다면, ‘없는 것, 비존재’의 것은 논하지 말아야 한다. 이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그래도 동의했다고 치고 따라 가 보자.
결론부터 밝힌다. ‘있다는 것’의 특징은 무엇일까. ‘있는 것, 존재한다는 것’은 생성되거나 소멸되지 않으며, 오직 하나이고, 흔들림이 없는 완결된 것이다. 성질이 변하지 않는 불변의 것이다. 이 부분도 동의가 되지 않을 것이다. 이 논리를 굳이 설득시키려는 마음은 전혀 없다. 그냥 이런 생각을 한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의 논리 줄기를 따라가면서 그 사상을 음미해 보자는 것이다.
두 가지 결과를 따라가 본다. 첫째 만약, 이 세상에 어떤 것이 생겨났다. 그 건 두 가지 가능성이다. 첫째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나타났거나 이미 존재하는 것으로부터 분리되었거나다. 그런데 우리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뭔가 나타났다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미 우리는 이 논리를 따라 가기 위해 ‘비존재, 없는 것’은 논하지 않기로 했다.
고로, 뭔가 생겨난 것은 없는 것에서 생성된 게 아니다. 소멸도 마찬가지다. 소멸되면 없어져야 하는 데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은 ‘생성하거나 소멸할 수 없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것이다. 어떻게 ‘무’에서 ‘유’로 갑자기 무언가가 튀어 나올 수 있나. 빅뱅도 이론일 뿐, 실존이라고 아무도 말할 수 없다.
둘째, 쪼개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쪼개지려면 틈이 있어야 한다. ‘틈’이라는 것은 비존재의 공간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미 ‘비존재’, 즉 ‘없는 것’은 무시하기로 했다. 고로, 틈이란 있을 수 없다. 다시 말하지만, 틈이라는 건 빈 공간이며, 비존재의 공간을 의미한다. 쪼개질 수 없다는 건 결국, 존재하는 게 여럿일 수 없다는 것을 설명한다. 여럿이라면 A와 B의 사이엔 공간이 있어야 하는데, 역시나 비존재는 없다고 가정하고 출발한 이론이니 여럿이란 것이 성립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고로, 존재라는 것은 틈이 없이 어느 것이 크고 작지 않은 꽉 차 있는 균일한 전체이어야 한다. 고로 하나이어야 한다.
[짬수다] 인도의 철학 경전인 ‘우파니샤드’에 이런 말이 나온다고 한다. ‘그것이 너다’. 이 말은 얼마 전, 내가 만약 무덤에 남기고 싶은 말이 있다면 ‘내가 너다’라고 적겠다는 나의 사상과 들어 맞는 말이었다.
다시 정리하면, 존재는 움직일 수도 없고 변형될 수도 없다. 따라서 절대로 변화하지 않는다. ‘영원한 자기 동일성’을 갖는 게 존재의 참모습이다. 이 말을 듣고 보면 존재는 중심점에서 모든 것이 일정한 거리를 두고 분포도 균일할 수 있는 ‘구’의 모습을 상상하게 된다. 또는 우주(?) 실제 우주가 ‘구’의 모습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뭔가, 혹시 실존하는 게 아니라 홀로그램과 같은 허상은 아닌가. 여기까지가 파르메니데스의 두 가지 진리의 길이다.
우리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현상’이다. 어쩌면 ‘존재’의 반대말은 ‘비존재’가 아니라 ‘현상’일 수 있다. ‘존재’는 있는 절대적인 것이고, ‘현상’은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현상’은 우리의 감각 능력으로 판단한다. 하지만 ‘존재’라는 ‘실재’는 그 현상 너머 우리의 능력으로 알 수 없는 ‘영원 불변하고 하나로 이루어진 그 무엇’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