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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파도키아 열기구

비현실적 고대 유적

by 오순미

나직하게 떠 있는 비행기에 간절한 마음을 몇 번 실어 보내면 한 번쯤은


"야, 타"


비행기가 오렌지족으로 나타난다.

이번에는 흑해와 지중해, 에게해가 품어 안은 튀르키예데려다준단다. 갤리 앞에 서서 목과 허리를 신전하느라 예닐곱 차례 들락거리다 보니 이스탄불 공항다. 이스탄불에서 첫 잠을 자고 다음 날 바로 카파도키아 지역으로 출발한다.


너른 벌판 카파도키아를 걸어서 보기엔 막막하기도 하고 길을 잃을지도 몰라 열기구에 의지하기로 했다. 자연과 시간이 공들인 만큼 기묘한 광경이 넘치는 카파도키아에선 인문의 흔적까지 만날 수 있다.


카파도키아 열기구는 상상 이상의 규모다. 건장한 튀르키예 남성 여섯이 벌룬을 이동하는 데도 상당한 무게감에 쩔쩔맨다. 거대한 벌룬 아래 10~20명 정도가 탑승할 만한 바구니는 동화 속 그림 같아 '올라 타도 괜찮으려나?' 슬쩍 민감해지는 부분이다. 가스로 불을 뿜어 벌룬을 꼿꼿이 세우는 데만도 시간이 꽤 걸린다. 쭈글쭈끌한 벌룬이 생명을 얻는 자체만으로도 장엄한 창조로 보였다. 넋놓고 진풍경을 바라보던 중 새벽 노가다에 여념 없는 청년과 눈이 마주쳤다. 소리 없이 웃는 모습에 입김이 허옇게 들러붙은 푸른 새벽의 기다림이 한없이 순미해졌다.


가스가 드래건처럼 하아악하악 무서운 기세로 열기를 뿜은 덕에 한껏 부풀어 오른 벌룬은 풍등처럼 환하다. 쉐이엑쉐엑 열기를 불어넣는 강한 불소리에 비해 미세하게 몸집을 던 벌룬이 곧추서자 드디어 탑승 허락이 떨어진다. 곧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비행이 시작될 것이다.


물오른 불두화처럼 둥글둥글 팽팽한 벌룬이 사뿐하게 떠오르자 하늘과 땅 사이를 유영하는 수십 개의 열기구가 이질적인 풍경으로 다가온다. 발아래서 이제 막 떠오르는, 먼 곳에서, 높은 데서 떠도는 벌룬이 비현실적인 배경이어서 저절로 입이 벌어진다. 어스레한 주위로 강렬하게 떠오르는 붉은 태양이 유유히 떠다니는 벌룬을 물들인다. 처음 보는 하늘가눈동자가 휘청거린다.


사부랑삽작 올라선 태양이 금세 오렌지빛을 흩뿌린다. 숨기 직전 필사의 힘으로 하늘을 밝히던 태양은 또렷하게 기억나지만 어둠을 넘어와 아침을 물들이는 태양은 실로 오랜만이다. 숨이 멎을 것 같다. 같은 높이에서 보는 듯 묘한 착각으로 가슴이 뛴다. 초자연의 힘이 눈물샘을 터뜨린다.


하늘이 온통 빛깔의 향연이라면 땅은 온통 흰 눈과 기암괴석의 앙상블이다. 수줍은 듯 빼꼼히 자기 모습을 드러내기에 여념 없는 기암괴석들은 회색빛에 머물지 않는다. 하얀 면사포 뒤에 숨어 머스터드, 샌드, 핑크빛으로 광활한 대지 위에 세심하게 도열해 있다. 자생적으로 독특한 모양의 기둥과 바위가 생성돼 끝없이 펼쳐진 괴레메 마을은 비잔틴 문화의 한 지점이 현재에 잘못 안착한 장면일지도 모른다.


머나먼 과거를 담은 최고의 비경이 지금 여기 내 발아래 펼쳐져 있다. 괴레메의 계곡들이 한 번 들어가면 빠져나올 수 없는 기이한 함정처럼 보인다. 하강 기류를 타고 낮은 고도를 유지할 때 사자 발모양 암석과 나무들의 정수리가 손끝에 닿을듯 가까워지자 심장이 짱구 궁둥이처럼 씰룩거린다.


"저기가 어제 본 우치사르 채(은둔자의 마을)인가?"

"여기가 파샤바 계곡(수도사의 골짜기, 스머프 마을) 맞나?"


열심히 묻지만 정답을 확인하려는 의도는 처음부터 없었다. 여기든 저기든 가름할 수 없을 만큼 경이로움이 철철 넘치고 있기 때문에 초현실적인 풍광이 명미하달밖에 다른 답은 이미 오답일 뿐이다. 화산이 폭발하고, 재가 굳어 생긴 부드러운 응회암이 풍화되면서 자연적으로 배열된 절경은 수천 년을 아우르는 찬란한 희열을 머금었다. 기암괴석 곳곳엔 로마의 박해를 받은 초기 기독교인들의 바위 주택이 조그만 창으로 흔적을 대신한다. 기암의 위용에 눌려 통제되지 않는 이성과 감정이 나를 노바디로 추락시키고 말았다. 그 혼돈과 쇼크가 복구의 기회를 줄 거라 믿는다.


고대 유적 위를 날으는 탑승객의 욕심을 눈치챈 파일럿이 열기구를 360도 회전시키는 아량을 베푼다. 환호와 박수로 인사를 받은 파일럿의 가지런한 수염 속에 옅은 미소가 번진다. 괴레메의 사방이 눈에 담기자 탑승객은 저마다 탄성을 내지른다. 아스라이 보이는 저 먼 지평선까지 거슬리는 것 없이 탁 트인 공간에선 지면에 닿을 듯 구름에 닿을 듯 그저 열기구만이 꿈을 꾼다. 갖가지 빛깔의 벌룬들이 태양아래 우후죽순 떠다니며 기암의 비밀을 발설하는 변절을 저지르지만 그마저도 절경이기에 용서가 가능했다.


카파도키아는 새벽녘에 나선 이방인 기대감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눈에 담고 가슴에 갈무리하며 나는 점점 카파도키아가 되어갔다.


내일의 승객을 위해 카파도키아는 오늘도 자연과 조율하기를 멈추지 않으며 변해가고 있을 것이다.



여행지에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어가는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여행은 어쩌면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여행의이유 김영하>



코로나 직전 다녀온 튀르키예 여행길(2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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