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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순미 Sep 26. 2023

생각을 펴는 시간

산책

요즘 밤공기 푹 퍼다 말리부르키나파소 같은 더운 나라에 내다 팔면 수익이 짭짤할지도 모른다. 나눔 할 수도 있지만 짧은 기간에만 공급되는 귀한 공기라 그냥 줘버리면 가치가 떨어질 듯해 조금이라도 받아야겠다는 심보를 감추지 못하겠다.


날 더운 여름엔 밤 산책을 나간다. 작열하는 땡볕을 고스란히 받다가는 학창 시절 운동장 조회 때처럼 픽 쓰러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최근엔 바람결이 달라진 걸 핑계 삼아 또 밤 산책을 나간다. 마땅한 공원도 없고 앞산이나 뒷산도 가지지 못한 형편이라 동네 한 바퀴를 돈다. 아니면 복개했 하천을 복원한 생태하천으로 나가 흘러가는 개울물 소리에 시선을 띄울 때도 다. 버들치가 어우렁더우렁 사는 풍경을 폰에 으며 그들의 시간을 방해하다가


쟤는 왜 맨날 우리만 찍는다니?


볼멘소리가 들리는 듯하면 아차 싶어 가던 길 향해 휑하니 달아난다. 달아나던 발길 앞에 덮개로 반쯤 덮인 유모차 끝으로 뒤꿈치가 맞닿은 아기 발이 시선을 잡는다. 발가락마다 한껏 오므린 걸 보니 긴장감 넘치는 상상을 펼치는 중인가 보다. 슬몃 웃음기가 돌며 그 생각이 궁금해진다. 


유모차를 감싼 잔잔한 평온을 스 길을 재촉한다. 보랏빛 수레국화는 지고 키 큰 홍초가 붉게 피었다. 홍초를 감싼 비한 수크령 눈길이 닿는다. 가볍게 쥔 주먹 안으로 수크령을 쓰다듬는다. 그의 가을이 좀 더 오래가기를 바라며 


너도 한 컷


인심을 쓴다. 앞뒤로 팔을 흔들며 숨차게 걸어야 유익하다지 속도는 그날그날 다르다. 대신 곧게 펴고 바르게 걷기를 지향한다.


편한 마음으로 걷다 보면 발길이 알아서 가던 길을 찾아간다. 자주 가는 이모네 집 동호수를 말해보라면 머뭇거리다가도 발걸음이 대지 떨군 무수한 흔적을 거리낌 없이 찾아가는 것과 같은 이치다.


생각이 많은 날엔 마냥 직진이다. 발길은 지난밤의 기억조차 까맣게 잊은 눈치다. 어디지 싶어 급히 정신 차리면 낯섦에 발바닥이 멈칫한다. 우두커니 서서 주변을 살펴야 비로소 어딘지 구분이 간다. 흔들리나온 건지 걸으러 나온 건지  수 없는 날에도 동네 한 바퀴는 무사히 끝나지만 군데군데 툭툭 끊어지기 십상이다.


임마누엘 칸트처럼 같은 시간 같은 공간을 몇 날 며칠 걷는 날은 고인 날, 의도적으로 산책길을 바꿀 때는 흐르는 날이다. 마음이. 

마음 상태에 따라 발걸음은 어찌해얄 태도를 정한다. 무게와 방향까지도. 가뿐하면서도 명확한 방향 틀기가 연속적으로 일어나면 그날은 최상의 기분이다.


데이트할 때 나란히 걷는 걸 좋아해서 전철역부터 집까지 40여 분 거리를 자주 걸었다. 그 바람에 사내 비밀 연애가 들통나긴 했지만 걷기의 매력은 내게 오래된 유물이나 마찬가지다. 일과 육아에 지칠 땐 해방로 걷다가 석연치 않은 점이 생긴 날엔 사유로 있었다. 생각이 너저분할 땐 명상로 걸었고 바라는 일이 간절할 땐 소원로 접어들었다. 불쾌한 심정이 깔리면 해소로 따라갔고 평온한 기분일 땐 활기로 걸었다.


같은 길이지만 때에 따라 확연한 차이를 보였던 산책길은 나를 거두기도 하고 키우기도 하고 깊은 한숨 그대로를 인정해주기도 했다.  기분을 짐작해 이름까지 바꾸며 헌신하는 길 위에서 난 오롯이 내가  수 있다. 길을 위해 아무것도 해준 게 없는 나 같은 이에게도 길은 한결같았다. 울적한 세상은 잊어도 좋다고 늘 다독여주었다.


피었던 꽃이 사라지고 들리지 않던 풀벌레 소리가 다시 돌아오는 순환의 계절. 소멸과 생성벌어지는 자연의 이치 사이에서 나는 오늘 밤도 자박거릴 예정이다. 말끔했던 마음이 쓸데없는 부스러기로 가득 차면 다시 우고 나다운 것들로만 채우기 위해 걷고 또 걸을 것이다. 일과처럼 습관처럼 걸어온 오랜 시간 속에서 산책은 기대하지 않아도 기대할 수 있도, 함정에 빠져겁내지 않도록 이끈 성숙의 길이었기 때문이다. 온전한 쉼, 깨끗하게 비질된 나와 마주하기 위해 고도의 훈련자 산책길에 여전히 나를 맡기려 한다. 그리하여 산책자 장 자크 루소처럼 천천히 걸었던 길을 그렇게 걸을 다.


오늘 밤 산책로에선 해묵은 사랑 노래가 들릴 듯한 예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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