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름엔 태양 같은 빨간 구두로, 한 겨울엔 눈빛 닮은 하얀 앵클부츠로 발을 감쌌다. 금장 단추 열 개가 2열 종대로 선 청금석빛 원피스로 가을을 호령했고 핏 되는 보랏빛 코트에 몸을 넣고는 칼바람일랑은 체온으로 물리쳐야 했지만 너끈하게 버텼다.
복장 컬러는 남달랐지만 과격한 모험주의자는 되지 못하여 목둘레 파인 정도, 스커트 기장이나 트임 수준은 유교걸의 기준이었으므로 '뉘 집 딸인지 참'이란 시선과는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색이 틘다며 까칠하게 지적했던 직장 여선배가 있었으나 학교도 아니고 엄연한 사회에서 웬 색감 타령일까 싶어 굳세게 고수했더니 얼마 후 그녀도 빨간 구두를 장만했다. 쨍한 컬러로 젊음을 발산하며 때에 따라선 당돌한 말투로 자신을 보호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당돌함과 제멋대로가 수용되었던 유일한 시절, 이십 대엔 거리낌이 없었던 것처럼 보이나 색감 뒤에 숨은 소심이 본성에 가까웠던지라 중년이 되면서 고스란히 회복되었다.
결혼 후 아이 키우며 사교육 강사로 일할 땐 수더분했다. 겁이 많아 귀도 뚫지 않은 상태라 귀고리를 해본 적이 없다. 멋 내기 염색이나 네일아트를 권유받았지만 어색하고 거추장스러워 내키지 않았다. 좀 더 솔직하자면 비용이 아까웠다. 일, 살림, 육아를 아우르는 나름 무수리 우먼으로 살던 중년 시절엔 밀착되지 않아 소화도 잘 되고 어떤 동작에도 지장을 주지 않는 편한 복장녀로 거듭났다. 무채색이 주를 이뤘고 가벼운 스타일을 선호하면서 특별함 같은 건 남의 것으로 알아 공손하게 양보했다.
드러난 부분만 보면 무리 없이 살았다고 말할 수도 있겠으나 마음까지 온전히 나로 살았느냐고 묻는다면 예쓰라 대답하기 앞서 한번쯤 멈칫거리게 된다. 마음의 소리를 듣고도 좀 인색하게 표현한 건 아닌가 하는 점들이 사무치게 배어날 때가 있어서다.
상대가 내릴 나의 평가에 신경 쓰느라 불편함 뒤에 숨은 속내를 묵인했다는 점
관계에서 불거진 갈등이나 맘고생이 거북해서 상한 감정도 참거나 변죽만 울렸다는 점
권리보다는 도리를 앞세우는 것이 미덕인 줄 알았던 점
무엇을 할 때 행복한지 마음에 대고 제대로 물어본 적이 없다는 점
누군 뭐 특별하겠어 다 이렇게 사는 거겠지 미루어 짐작하고 당시의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했다는 점
스스로 선택한 일이고 적절하다 판단했지만 우회전이든 좌회전이든 그 길에서 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할 때도 일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는 점
점묘화처럼 콕콕 찍은 점들이 생기도 없고 융통성도 없지만 감당하는 법을 배운 과정쯤으로 여기면 그다지 야박한 일도 아니라며 쿨하게 인정도 한다. 그러나 점들 사이에서 순간순간 치고 올라오는 '싫음'이라는 감정까지 느긋하게 받아들이기가 나에겐 너무나 요원한 일이었다.
감당에서 조금 비껴 선 마음이 지난날을 돌아보며 이젠 나로 살아보라고 부추기지만 무난하려고 애쓴 사람으로 살아온 나는 지금도 불편한 감각을 매만질 줄 모른다. 뚝 잘라 버릴 건 버리고 성한 쪽만 저장해도 되건만 잘라내는 데까지 시간이 지체되어 멀쩡하던 감각마저 불편한 자극으로 물들이곤 한다. 오랜 시간 그렇게 살아온지라 느닷없이 들여다본 내 마음이 뭘 해야 즐거운지, 무엇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지도 잊은 것 같다.
경보음이 울리기 전에 이젠 조금씩이라도 나를 말하려고 한다. 그동안 나를 알았던 사람들로부터 '낯섦'이라는 경고를 받을지언정 하기 싫은 건 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다 보면 즐거운 게 뭔지, 소중한 게 뭔지 알게 되지 않겠는가. 그 안에서 멋지게 늙어가고 싶은데 멋진 적이 없어 가능할지 모르겠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아니라고 팽개치기보다는 원하는 것이 뭔지 천천히 생각하고 결정하려는 중이다. 그중에 하나
'글쓰기, 너로 정했어'
야심 차게 덤비고 있지만 결코 쉬운 길은 아니라는 걸 알아가며 세상 참 어렵다고 투정 부리고 있다. 하지만 뭐 이제 시작이니까 당연히 서툴고 초라할 수밖에...
'천천히 가보자구 내 마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