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에서 가슴까지는
두 뼘 정도의 거리다. 한 걸음의 보폭조차 안 되는 30cm 정도지만 좀처럼 가까워질 수 없어 서로 다른 생각을 할 때가 예삿일이다. 머리는 사회적 가치와 도덕이 서식하는 곳이라면 가슴은 현실적이고 보편적인 생각 외에 연기할 줄 모르는 본능이 숨 쉬는 곳이다. 머리 뜻대로 살다 보면 과도한 억압에 가슴이 무너지고 가슴 뜻대로 살다 보면 간혹 양심과 현실 세계가 흔들릴 수도 있다.
도덕적 사고가
뚜렷하게 설정되었던 심청이라 하더라도 아버지의 허무맹랑한 약속 때문에 무시무시한 바다에 몸을 던져야 하는 처지가 되었을 때 단 한 번도 미워하는 마음이 일었던 적 없었을까 짐작해 본다. 자식이기 전에 인간이므로 도덕과 규범에 반하는 생각에 갇히지 않았을까? 머리로는 고생하며 키워준 아버지의 눈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했으나 가슴에서 일어난 원망 때문에 질책하고 자책한 순간이 있었을지 모른다.
인내와 희생이 요구되는
간병에서도 머리와 가슴은 충돌할 때가 있다. 간병 기간이 길면 길수록 심적 부담이 극심해지고 처음 품었던 안타까움과 속상함이 점차 희석되어 꽁꽁 숨겨둬야 마땅한 이기적인 마음이 불쑥 고개를 쳐들 때가 있다. '긴 병에 장사 없다'는 환자 중심으로 돌아가는 일상에서 보호자의 삶이 사라져 갈 때의 무기력을 대변하는 말이다. 환자의 처지에서 보면 처음 같지 않은 보호자의 마음이 서운하고 괘씸할 수 있기에 조심스러운 말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한 사람은 만족감이 떨어지고 한 사람은 끊임없는 노동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으니 가슴의 언어가 무의식적으로 입술을 뚫고 드러나 갈등을 일으킬 수 있다.
외국 동화 중에
몸 전체를 유리로 만든 유리 소년 이야기가 있다. 유리로 만들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소년의 마음까지 훤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당연히 호기심이 생길 수밖에 없는 모습이라 사람들은 소년에게 관심을 갖고 선의를 베풀며 우르르 몰려들었다. 처음에 가졌던 호감도 잠시 소년은 동네 사람들로부터 극렬한 비난을 받는 처지가 된다. 가감 없는 소년의 마음까지 들여다볼 수 있었던 사람들은 어떻게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냐며 면박을 주기 시작한 것이다.
유리 소년처럼 가슴은 핀잔받아 마땅한 생각, 들키고 싶지 않은 생각 등 부도덕하고 비합리적인 감정도 가질 수 있는 곳이다. 어떤 생각도 가능한 곳이며 그 생각으로 만족감을 얻을 수 있는 원천이기도 하다. 다만 겉으로 나타나는 태도나 언행이 속마음과 다를 수 있는 건 초자아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조절하며 표출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속마음까지 모조리 노출될 수밖에 없었던 유리 소년의 삶이 아찔하고 섬뜩하다.
융(Carl Gustav Jung 스위스 정신의학자)은
집단이 개인에게 준 역할, 의무, 약속, 그 밖의 여러 행동 양식을 '페르소나'라고 불렀다. 우리말로 가면, 체면과 같은 뜻이다. 페르소나는 사회생활과 공동생활의 적응기에 필요한 요소지만 마음과의 관계를 상실한 페르소나는 껍데기에 불과하다. 사회가 요구하는 역할에만 부응한다고나 할까? 따라서 페르소나를 제대로 지켜내려면 속마음이 갈망하는 게 무엇인지 들여다보며 외부세계와 조절할 수 있어야 효과적이라고 했다.
머리로는
당연하고 마땅한 생각들이 마음에선 거부될 때가 있다. 그 마음 들키지 않으려 억제하며 살다가는 희생양이 되기 쉽고 좀처럼 자신의 뜻을 펼칠 수가 없다. 그렇다고 본능으로만 살다 보면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쾌락에 빠질 수도 있다. 되도록이면 머리와 가슴이 분리되지 않고 같은 생각을 가진 채 살아가는 게 최상이지만 뉘라서 완전할 수 있단 말인가.
성숙한 어른으로 살아가려면 30cm의 조율이 약해지지 않게 마음속 갈등을 해소하고 심리적 긴장 상태를 줄여가도록 연습해야 한다. 마음에 진 그늘을 최소화하는 일에 집중하려고 할 때 나는 나의 통솔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