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시간여의 외도 일정을 마치고 지세포항으로 돌아오니 배고픔이 몰려왔다. 근처를 배회하다 식구들이 선택한 곳은 굴국밥집. 아침도 소홀했고 전날의 음주도 구슬릴 겸 식구들은 따끈한 국밥에 이끌렸던 모양이다. 외관이 허름해서 안중에도 없었지만 식구들이 좋다하니 어쩔 도리 없이 따라갔다. 안으로 들어서니 두 테이블에 손님이 있어 좁은 내부가 복잡했다. 내키지 않았지만 퀭한 마음을 접고 자리에 앉았다. 식사를 주문하고 손을 닦는 사이 국물이 찰랑거리는 뜨끈한 국밥이 냉큼 올라왔다. 따로 국밥 체질인데 그것조차 바람을 비껴갔다. 심술이 턱밑까지 차올랐다.
뜨가운 열을 한 김 식히려 숟가락으로 국밥을 뒤적거리자 콩나물 사이사이 왕방울만한 굴이 득시글거리는 게 실해 보였다. 웬지 융숭한 연향 같았다. 간사하다 싶었지만 차오른 심술이 금세 두 단계쯤 내려갔다.
호로록 국물 한 술 삼켰다. 삼삼한 국물에 입안의 혀가 안달이 났다. 간이 일품이었다. 숟가락에 뽀얀 굴 하나 떠서 잇새로 밀어 넣었더니 몽실몽실 씹히는 게 고소하고 싱싱했다. 툴툴거렸던 사나운 심술을 잽싸게 내려놓고굴국밥에 열중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어 우연히 들른 마뜩잖은 식당에서 맛깔난 밥상을 받은 경험이 여러 번이지만 섬세한 기질은 아직도 깔끔한 외관에서 미리 맛을 결정짓곤 한다. 고정관념이 여행의 일부를 부정적으로 좌우하는 것에서 언제쯤 해방될는지. 쯔쯧
옹색한 대접으로 오전 내내 분노했던 배 속이 따뜻한 국밥에 노여움을 풀었다.
점심을 먹고 나니 뱃속이 풍요로웠다. 몸을 깨워줄 한 잔의 커피를 마시지 못한 터라 커피가 간절했다. 때를 놓치긴 했으나 뜨거운 라떼 한 잔으로 속을 달래야지 '신선대'가 눈에 들어올 것 같았다. 요리조리 누비다가 큰 길로 나오니 사거리에서 카페가 나타났다.
"테다 커피는 세계 3대 커피 전문 로스터리 샵입니다."
라고 적힌 입간판을 지나니 '테다 커피(TAEDA COFFEE 커피 볶는 집)'라 쓰인 입구가 나왔다. 연쇄점이 아니란 이유로 '유명한 집이 아니네'뇌까리며 고정관념의 늪에 다시 한 번 빠지는 찰나다. 내가 아는 '유명한'이란 스타벅스나 폴바셋, 파스쿠치, 테라로사, 투썸 정도랄까. '유명한 카페'라고 커피 맛이 보장된 건 아니지만 그나마 실패할 확률이 낮아 알려진 이름이 주는 신뢰의 그늘을 무시하지 못한다.
내부는 자그마했고 커피 향은 그윽했다. 메뉴가 다양했으나 다른 곳은 힐끗 바라만 볼 뿐 라테 쪽으로 눈길을 돌려 뭘 고를까? 전투적으로 쏘아 봤다. 오랜만에 달달한 게 마시고 싶어선지 바닐라 라테만 큼직하게 보였다.
주문 후에야 메뉴에 뭐가 있나 다시 살피니 핸드 드립 커피 중에 5만원이라 적힌 <코피 루왁>이눈에 꽂혔다. 연이어<자메이카 블루마운틴>과 <하와이안 코나>는 각각 2만원. <예멘 모카 마타리>는 1만2천. <쿠바 크리스탈 마운틴> 1만5천. 어떤 맛일지 궁금한 건 사실이지만 '멈칫과 쭈뼛'이 오갈 고가인 만큼 아예 의식의 범위에 들어설 수 없는 커피 이름들이 메뉴판을 당당하게 잠식했다. 5만원에 커피 한 잔이라. 여염집 아낙으로 살아온 지 어언 30여 년 가까이 되자 구매가격 수위조절은 감성을 외면한 채 꿋꿋하게 현실을 추종하고 있다. 때문에 5만원짜리 커피는 고민 없이 통과다.
커피 하면 브라질과 에티오피아, 콜롬비아를 떠올렸고 베트남이 뒤쫓는다고 알았는데 자메이카와 예멘이라니 내 상식의 모래성이 솨라락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무조건 라테만 주문할 줄 알았지 국가와 산지, 원재료의 특성에는 무관심이었네. 쯔쯧
그나마 <코피 루왁>을 안다는 것에 나의 미천한 커피 인생이 자존심을 지켰다.
<루왁 커피>는 후각이 예민한 사향 고양이가 품질 좋은 커피 열매만 골라 먹은 후 싼 배설물에서 씨앗을 채취해 햇볕에 말린 후 볶아낸 커피다. 사향 고양이의 소화 과정에서 나오는 특수한 효소 때문에 원두의 쓴맛, 떫은맛은 사라지고 특유의 맛과 향을 가진 커피로 변신한다. 위장에서 머물다 나온 커피 체리가 오히려 기품있는 맛으로 변한다니 다행이긴 하지만 꺼림칙한 느낌은 지울 수 없다.
'코피=커피'와 '루왁=사향 고양이'가 결합하여 <코피 루왁>이 된인도네시아 고양이똥 커피 외에도 베트남 족제비똥 커피(위즐), 태국의 코끼리똥 커피(블랙 아이보리) 등 다양한 똥커피가 희소성이 높다는 이유로 가격대가 밉살스럽다. 루왁 커피 맛이 특별하다지만 결국엔 동물의 똥에 섞여 나온 것이기에 씻어 말린 것이라곤 하나 비위생적이라는 생각엔 여전히 변함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심 후한 귀인을 만나 코피 루왁을 마실 기회를 준다면 거절하진 않을 예정이다.
커피를 주문하고 기다리는 동안 카페 안을 둘러보니 아담한 규모에 깔끔한 진열이 돋보인다. 모던한 테이블 위에 달린 전구색 샹들리에를 따라가다 문득 서까래와 대들보가 만나는 고색창연한 천장과 마주한다. 지난 날과 오늘 날이 어우러진 차분한 분위기다.
매장 안에 '세계 3대 커피'에 대한 설명이걸렸다. 메뉴에서 봤던 기세등등한 가격 때문에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커피들이 세계 3대 커피란 제목을 달고 우쭐거리기에 나도 사진 한 장 찍어주며 인심을 뽐냈다.
생산량이 제한적이라 귀하다는
<자메이카 블루마운틴>.
신맛, 쓴맛, 감칠맛이 어우러져 풍부한 바디감을 가지며 매끄러운 감촉의 원만한 맛으로 꽃향기 닮은 향은 커피의 으뜸이란다. 커피에서 느낄 수 있다는 감칠맛이란 대체 뭘까? MSG가 숨어서 열일이라도? 속으로 킬킬거리며 궁금증을다독였다.
카리브해의 섬나라이며 레게의 나라로만 알았던 자메이카. 블루산은 자메이카에서 가장 긴 산맥으로 기후가 서늘하고 배수가 잘 되는 비옥한 토양이라 커피 재배에 이상적인 곳이란다. <자메이카 블루마운틴>은아로마(추출한 액상 커피에서 생긴 기체가 후각 세포에 닿아 느껴지는 향기-불어)가 풍부하고 쓴맛이 덜하며 부드러운 향미를 갖춘 우아한 커피라고 하니 고결한 인품을 지닌왕비가 떠오른다. 산 이름에서부터 매력적인 커피 향을 먼저 느낄 수 있어 색감까지 궁금하다. 고유의 갈빛에 은은한 푸른 빛이 도는 건 아닐는지......
좋은 풍미와 향으로 마니아층이 형성돼 있다는 <하와이안코나>.
원만한 바디감과 와인의 맛을 가졌으며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같은 느낌의 향미란다.
흠, 바디감이 원만하다? 커피에서 와인 맛이?10점 만점에 10점을 주고 싶은 이끌림 강한 커피로 다가온다.
하와이 섬 코나지역에서 재배되는 커피로 상큼한 신맛과 옅은 단맛에 산뜻한 향까지 더해 저녁에 마시기에 적당한 커피라니 더 관심이 간다. 저녁엔 불면 때문에 마시고 싶어도 마실 수 없는 처지인데 저녁에 어울리는 커피라니 유유자적한 맛일 것 같다. 매년 11월이면 하와이 코나 커피 축제가 열려 다양한 행사가 펼쳐진단다. 이곳에 가면 축제내내 커피 향에 절어 살 수 있다는 생각을 하니 테라피가솟구친다. 냄새에 민감한 편이라 세계적인 향수도 나에겐 두통 유발 물질에 불과하나 맘껏 들이켜도 자꾸 마음이 가는 건 유일하게 커피 향뿐인 까닭이다.
커피의 귀족이라 할 만큼 고상한 맛의
<예멘 모카 마타리>.
머스크 향과 초콜릿 향의 오묘한 조화가 우아하고 독특한 맛을 낸단다. 새콤한 맛, 쓴맛의 조화 가운데 다크 초콜릿 향이 강렬한 커피 <예멘 모카 마타리>는 내 취향이 아닐 듯하다. 초콜릿 향이 써억 내키지 않아 초코 아이스크림이나 카페 모카를 먹기 위해 지갑을 여는 일은 드물기 때문이다.
서쪽으로 홍해가 있는 아라비아 반도에 위치한 예멘. 예멘의 베니 마타르 지역에서 생산되는 예멘 최고의 커피. 특히 반 고흐가 좋아한 커피라 그를 사랑하는 팬들은 '고흐와 소통하려면 모카 마타리를 마셔야 한다'고 할 정도였단다.
'모카'는 유럽으로 커피를 전파한 17세기 예멘의 무역항이어서 일반적으로 '예멘 커피'하면 '모카(mocha)'를 추억한다. 아쉽게도 현재의 모카항은 작은 시골 어촌 마을 수준이어서 당시의 명성을 볼 수 있을 거란 예감으로 찾았다간 낭패를 볼 거란다.
평생을 아줌마 커피에 묶여 산 내겐 '커피 이름'도 '커피의 바디감'이란 말도 생소했다. 찾아보니 바디감이란 커피가 닿는 느낌, 즉 커피가 입안으로 들어왔을 때 주는 무게감이나 입안에서 느껴지는 감촉 정도로 이해하면 될 듯했다. 커피 전문가가 아니라서 상세한 표현은 불가하지만 바디감이 어떤 것인지 조금은 알 것 같다.
먹고 싶을 때 마주친 커피여서일까? 딱 한 모금에 홀딱 반했다. 달지 않은 듯한데 입안 가득 네추럴한 달달함이 퍼지고 커피와 우유의 비율이 절대 감각이라 비교되거나 맞설 만한 것이 없었다. 치수를 재어 만든 옷을 입은 것처럼 내 취향에 꼭 들어맞는 향과 맛이었다. 가볍지 않은 바디감에 상당히 보드랍고 말쑥한 바닐라 라테였다. 생생하게 기억될만했다. 지세포에 들르면 다시 가고 싶은 곳으로 선명하게 떠오르는 커피 맛집'테다'.그날 '신선대'에서도 '바람의 언덕'에서도 숙소에 돌아온 후에도
"바닐라 라테 끝내줬는데~"가
방언처럼 투욱툭 터져나왔다.
하루 한 잔에 만족해야 하는 감질난 내 커피 운명을 송두리째 맡기고 싶은 '테다 커피'가 오늘,강물 위 달빛처럼 아른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