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이라고 부산스럽게 서두르면 부산이 정신없을까 봐 느긋하게 하루를 열었다. 국밥쟁이 부산에 왔으니 돼지국밥은 먹여야 할 것 같아 숙소에서 가장 가까운 집으로 검색해 놓았다. 아니나 달라
"부쏴네 와쓰이 돼지국빱 아이가"
어색한 사투리로 신호를보낸다.
"돼지국빱이 그리 존나?"
샐쭉대지만 맘은 이미 국밥으로 정했다는 걸 알려나?
아침 겸 점심을 먹기위해 국밥집에 당도하니 다양한 세대가 식사를 하고 있다. 남항시장 안에서 소문난 맛집이었나보다. 순대국도 있기에 하나씩 주문했다.
"돼지 하나, all순대 하나"
주문을 외치는 주인장의 말에 'all순대(부속고기 없이 순대만 들어간 순대국)'라는 별칭이 재밌고 넉넉하게 들려 웃음을나눴다. 비냉, 물냉을 처음 들었을 때처럼 신박했다.
바람이 제 구실을 하기에 우리는 털모자를 단단히 여민 후 '흰여울문화마을'을 찾아 나섰다.
아래는 바다를 품에 안은 '절영해안산책로'이고 흰여울마을과 해안로 사이 가파른 절벽 위로 좁고 긴 마을 길이 나 있다. 피난민들의 애잔한 삶이 시작된 곳이란다. 흰여울길 안으로는 작은 집들이 오밀조밀 자리했고 열네 개의 골목길이 젖줄처럼 이어졌단다. 길을 따라 좁게 뻗은 골목 사이 그리스풍 카페, 아기자기 기념품 점빵, 풀빵집, 독립서점, 공방, 영화 《변호인》 촬영지 등이 늘어서 있다. 한가로운 걸음마다 영도 앞바다 풍경은 무한 덤으로 다가온다.
겨울 햇살로 가득한 흰여울길 끝자락에서 '흰여울전망대'를 만나면 가히 온 몸에 소름돋을 풍경이 나타난다. 돌담과 돌담 사이 계단 끝에 영도 바다 일부를 뚝 떼어다 붙인 듯한광경. 바람이 거세지만그 바람 모조리 맞으면서도 내려가지 못하고 바라볼 수밖에 없는 절경이 거기 있다.
캬, 햐, 후아 같은 짧은 감탄사만 내뱉다 하염없이 긴 '피아노 계단'으로 내려가면 '절영해안산책로'와 만난다. 가까이에서 부서지는 파도, 멀리서 밀려오는 파도, 그 사이를 지배한 배들, 나무랄 데 없는 햇살의 은덕, 차갑지만 충분히 용서할 수 있는 바람이 영도 앞바다에서 끊임없이 출력되는 걸 볼 수 있다.
한 바퀴 돌아나오는 길에 옛날 생각에 젖어 풀빵 몇 개 사봤다. 하마터면 집으로 오는 길을 놓을 뻔했다. 옛 맛을 어찌나 잘 살렸는지 주야장천 풀빵만 먹고 살래도 눌러앉아 살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오륙도 스카이워크'에서 스릴, 요 녀석 혼꾸멍 좀 내줄까 했더니 지레 겁먹었는지 입장불가란다. 대신 죽도록 그리운 커피 한잔이 아른거려 '해파랑 카페'라고 보이기에 불쑥들어갔다. 바람 한 점 스미지 않을 뿐더러 통창으로 들이치는 햇발과 풍경, 흐르는 커피 향에 홀딱 반해 자리부터 차지했다. 카페라테 또한 어안이 막힐 정도로 향긋하고 진했다. 꼬들꼬들한 하트 거품은 다 마실 때까지 사라지지 않고 기다려주었다. 마치 귀한 사랑을 지키려는 머슴아의 뜨거운 가슴처럼 마지막까지 모양을 흐뜨리지 않았다. 적당한 당분과 그윽한 레몬향에 쫀득한 크림이 여러 겹으로 얇게 쌓인 케이크도 아주 그냥 혀를 살살 간지럽혔다.늦은 오후의 커피라 숙명처럼 따라다니는 불면이 신경쓰였지만 커피와 케이크의 정석 앞에 걱정은 잠시 접기로 했다.
여행지마다 발산하는 힘이 우리에겐 새로운 에너지로 충전된다. 음식, 건축물, 인공물, 역사, 휴양, 사람 등 어느 하나에서든 만족감이 충만하면 그 여행은 곧장 에너지원이 된다. 아이들 어릴 때 처음 갔던 부산이 정보와 같았다면 오랜만에 다시 찾은 부산은 감성이었다. 습득하려고 애쓰기 보다 흐르는대로 따라가보니 부산의 숨은 매력이 저절로 꽂히는 것 같았다. 정보는 잊히기 쉬우나 아로새긴 감성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 께느른할 때마다 삶의 무늬로 되살아날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