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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순미 Jul 28. 2022

사회 초년생 앞에 뜬금없이 나타난 호위무사

사내 연애 1

웹툰을 드라마로 제작한  '사내 맞선'을 즐겨 시청했다. 재벌가 남주와 평범한 여주가 계약 연애로 엮였다가 서로의 매력에 빠진다는 뻔한 내용의 로코 드라마. 


대사도 간질간질하고 내용도 상투적이지만 '빠름빠름'전개가 시원시원하고 명쾌했다. 샌드위치   베어 물 때  비어져 나오는 소스처럼 의식 속에 잠들었던 지난 날 사내 연애가 비죽이 삐져나와 보는 내내 웃음이 번졌다.   




젊고 푸르른 날, 방송기기 제조 회사에서 근무했다. 개발부 인원은 삽십  넘었고 그 중 여성이 5명이었으며 전체가 네팀(디자인, 회로, 기구, 행정)으로 나뉘어 각자 역할에 충실했다. 

음향기기를 개발하고 생산하는 회사라서 부서는 남자 사원의 비중이 높은 편이었다.


부서 내에서 거의 막내지만 당돌한 시절이었다. 거칠 것 없고 밀리지도 않았다. 스스로는 자신감이라고 해석했지만 주변인의 시선으로는 오만방자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젠체하거나 교만하지는 않았다. 나에게 부당하다고 생각되는 일에만 반격했을 뿐이다. 돌이켜보면 그땐 뭣이 그리 당당했는지금과는 영 딴판이었다. 지금 내게 남은 건 핼쑥한 자신감뿐이다.


근무 분위기는 남성 중심적 환경과 멀었다. 여자라고 낮잡아 보거나 당한 업무 외의 허접한 일들은 떠넘기지 않았다. 부서장도 본인 커피는 알아서 해결하는 타입이라 그 흔한 커피 심부름으로 마음 상하는 일 따윈 일어나지 않았.

간혹 해외 중요 바이어와 회의가 진행될 때는 여자 사  가장 윗선배에게 정중히 부탁하는 일은 있었다. 부서장이 제일 막내에게 부탁했다면 이름 그대로 커피 심부름이었을 텐데 윗선배의 차지가 되고 나니 사뭇 중요한 버전으로 다가왔다. 같은 일인데도 태도나 상황에 따라 심부름이 될 수도 있고, 참여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n86세대 사무실 분위기 치고는 비교적 순조로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진급은 말 그대로 유리천장이었다. 남자 동기들이 대리가 되는 동안에도 여자는 진급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일 자체만 놓고 볼 때는 수평관계였으나 구조적 불평등은 시대를 앞서가지 못했다. n86세대의 여성에겐 가혹한 시절이었다.


당시 사내 직원들은 결혼 후 대다수가 회사를 떠나는 분위기였다. 사규에 결혼 후 사직해야 한다는 규정(확인하지 않아 모름)이라도 있는 것처럼 여직원들에게 결혼은  퇴사라는 공식이 암암리에 성립되었다. 개인의 문제였다면 따졌을지 모른다. 전체적인 분위기라 나서서 저항할 생각도 의지도 없었고 당연한 수순인 듯 순순히 받아들였다. 좁은 시야에 들어 앉아 내 앞가림만 하면서 만족했던 것 같다.


사내에는 여러 모임이 자발적으로 결성된 상태였다. 전체 여직원들모임, 각종 동아리, 또래 모임 등이 구성돼 직장 생활에 활력을 불어 넣었다. 사내 모임이 다양해 타부서 직원들과도 소통이 잦다보니 일처리가 신속했.


우리 팀 선배의 권유로 볼링 동아리에 합류했다. 스포츠에 관심이 없어 망설였으나 가보고 나서 결정하자는 마음에 일단 참석해 봤다. 여러 부서 직원들이 함께 모인 곳이라 신입 회원 처지에선 많은 사람을 금방 알게 되는 이점이 있었다. 그때 이후로 볼링이 유일하게 할 줄 아는 스포츠가 되었다.


동아리로 엮이고 일로도 관계를 맺으며 우리 팀 선배와 나, 남자 3명까지 모두 다섯이 또 하나의 모임으로 자연스럽게 구성되었다.

연극 공연도 같이 가고 여행도 다니며 자리도 종종 가졌다. 술은 잘 마시지 못해도 분위기에 취하는 건 선수였다. 특별한 주제를 갖고 만나기보다는 퇴근 후 문화 생활을 공유하는 정도였다. 자주 만나보니 서로 합이 맞았다. 신중하지만 빠지지 않는 유머 덕분에 즐거움도 따랐. 누구 하나 정에 맞을 모난 돌이 없어 모임은 항상 순조로웠다. 낯설고 미숙한 초년생의 슬기로운 사회 생활에 디딤돌이 되어준 모임이었다. 회사 내에선 신입 사원 역할을 제대소화하고 밖에선 막내가 가진 특권을 한껏 누릴 수 있게 거들어 도왔다.


귀가 시간까지도 안전을 이유로 호위 받으며 돌아왔다. '호위'라는 말은 곁에서 보호하고 지킨다는 뜻이지만 사전에 등재되지 않은 다른 의미도 있다는  그땐 미처 몰랐다. 특히 '잦은 호위'는 예상치 못한 상황으로 전환될 우려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가 있으려나?

흠, 영화 <보디가드>를 봤다면 짐작할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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