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로 살아낸 일곱 여성의 일곱 가지 삶 <여자전>
<외로운 사람끼리 배추적을 먹었다>를 읽으면서 '깊이 몰입하면서도 누가 되지 않도록 신경 쓴 저자가 공감하며 써내려간 인터뷰이의 삶이 궁금하다, 남편 없이 광산 김씨 종부로 평생을 산 저자의 고모 김후웅의 일생은 어떤 구도로 펼쳐질까'란 생각이 연신 따라다녔다.
그래서 옮겨간 책 <여자전>은 역사 앞에 온몸을 내던져 숱한 곡절을 삼키고 삭인 일곱 여성의 삶으로 나를 이끌었다. 수많은 이야기를 들으며 함께 울고 웃는 중에도 저자 김서령은 여인 7인의 삶과 증언을 선연하고 섬세하게 재구성했다. 글 쓰는 이들이 '서령체'라 명한 그녀의 문장은 역시나 돋보였다.
저자는 목차에서부터 이미 이야기를 시작한다. '지리산 빨치산', '가문을 지킨 종부', ' 일본군 위안부', '팔로군 출신', '문화판 욕쟁이', ' 치열한 춤꾼', '한 달 인연'이란 7인의 별칭을 내놓아 다양한 삶으로 안내하겠다고 예고한다.
'왜 살아도 살아도 끝이 안 나노', '죽음의 강 황하를 건너온 소녀', '지상에 없는 남자, 그만을 향한 50년'과 같은 소제목에는 고달픔과 외로움이 서렸다. 상상도 하지 못할 일들이 그녀들의 삶을 결박했을 텐데 어떻게 견뎠을까, 서둘러 생의 경로를 따라가도록 부추긴다. 훑다보면 그녀들의 삶과 이미지가 책 밖으로 불쑥 튀어나올 것만 같다. 여인 7인의 일생을 압축한 목차는 실루엣이 꽤나 굵직해서 궁금증을 증폭시키기에 충분하다.
무겁고 답답한 심경으로 써내려간 김후웅의 기구한 삶
생생하고 탄력 있는 문장으로 무장한 <외로운 사람끼리 배추적을 먹었다>를 읽을 때부터 김후웅의 이야기가 궁금했기에 <여자전>에선 그곳부터 읽었다. 고모가 살아온 시간이 극적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극히 미약해 저자의 몸 가장 먼 곳까지 답답한 심경이 퍼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아무도 모른다. 기질 곱고 인정 많은 유일재 17대 종손, 그 사람이 평생 집에 돌아오지 못하고 평양에 살고 있어야 하는 이유, 그 아내 김후웅이 평생 과부 아닌 과부로 살아야 하는 이유, 그걸 대답해 줄 사람이 지금 아무도 없다.(82쪽)"
열여덟에 만나 스물둘에 헤어진 후 가문의 의무와 전통을 지키며 기다린 남편을 김후웅은 54년 만에 이산가족으로 상봉한다. 전쟁과 분단이라는 시대적 소용돌이가 한 여인의 삶을 모질게 쓸어가 한 방울의 눈물도 흘릴 수 없었던 기막힌 해후. 몇 달 후 일본을 경유해 온 남편의 편지에 쓰인 '귀한 몸'이란 한 마디에 김후웅은 그만 억눌린 눈물을 쏟고야 말았다. 자신의 몸을 움직여 다른 사람을 돌보느라 평생 노동에 몸이 묶였던 김후웅. 그녀는 80이 다 된 노인이 되어서야 "귀한 몸 건강히 지내는지"란 구절에서 비로소 '신외무물(몸이 가장 귀하다)'에 가까이 가본다. 하지만 이내 천골의 자리로 돌아간다. 시대가 정해준 자리에서 굳은 몸이라 '귀한 몸'에 선뜻 동의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김후웅의 삶은 의지와 무관하게 파괴되었지만 억울하다고 하소연할 곳도, 기회도 없었다. 어처구니없는 이 운명을 무엇으로 대체해야 노엽지 않을까.
그러나 정작 김후웅은 그 운명을 희석하려 애쓰지 않았다. 가난과 외로움이 지속되는 가운데서도 남편의 부재를 중심축에 두고 내면의 균형을 잃지 않았다. 조용히 가정을 지키며 꿋꿋하게 삶을 꾸렸다. 역사적 폭력에 삶의 전반이 전복됐지만 원망 따윈 하지 않았다. 살아있다는 확신도 소식도 없는 남편을 기다리며 관계에 대한 책임을 지는 품위까지 지키며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그것은 김후웅이 품은 삶의 격이며 자신을 보존하는 방식이었다. 어두운 역사에 사정없이 흔들린 여자에게서 스스로 꼿꼿하게 서기 위해 거듭했을 자기 암시의 힘이 느껴졌다.
각자의 방식으로 생존과 존엄을 지킨 여인들의 삶
김후웅의 삶 못지않게 애절하고 기구한 삶은 책갈피마다 묵직하지만 저자의 탄탄한 문장력 덕분에 술술 넘어간다.
가족을 찾기 위해 뗀 첫걸음이 전쟁과 분단이라는 역사적 상황과 맞물려 평생 빨치산이란 꼬리표를 달고 쫓기는 생활을 전전했던 삼천포 부잣집 막내딸 고계연은 '저항'.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 인간성을 훼손당한 채 오랜 침묵으로 일관하다 자신의 상처를 역사적 기억으로 전환한 김수해는 '증언'. 오로지 배곯지 않으려고 오빠들 따라 중국 팔로군에 입대해 7년이나 전쟁 속에서 살다 중국 기공 수련가로 거듭나 삶의 에너지를 찾은 윤금선은 '재창조'. 젊은 민주 투사를 추모하는 공연예술일 뿐인데 청와대, 안기부, 경찰까지 압력·견제·감시로 저지하자 욕을 퍼부으며 거칠게 맞선 문화계 욕쟁이 박의순은 '불도저'. 춤이란 기생이나 무당이 되는 과정이라고 인식한 오빠들에게 맞아 종아리가 퉁퉁 부어도 춤을 놓지 않아 세계적인 춤꾼으로 거듭난 이선옥은 '예술혼'. 한 달의 사랑을 교통사고로 잃었지만 그 사랑을 부정하지 않고 평생 간직한 최옥분은 '지고지순'. 짧은 음절 안에 사나운 삶이 다 담길 순 없지만 매 순간을 자기답게 살아낸 의미만이라도 전해지기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그녀들의 삶은 서로 다른 질감이었지만 버티고 맞서며, 변화하고 기억했다. 일제 강점기, 해방, 전쟁, 분단, 폭력, 가부장제, 상실이라는 주변부 조건들 속에서도 각자의 방식으로 생존과 존엄을 지킨 일곱 여성의 고단한 삶에선 결코 타박이란 걸 볼 수 없었다. 외려 빛으로 발하고 불꽃으로 타오르며 고리타분한 시대 조건을 통과하였다. 제도를 개혁한 혁명가는 아니지만 살아낸 방식 자체가 이미 혁명인 셈이다.
시대는 일곱 여인의 궤적을 모른 척했지만 아랑곳하지 않은 그녀들은 삶을 배신하지 않았다. 그것은 곧 '나도 한 시대의 흔적' 이라는 자기 선언을 가진 사람의 태도와 같다. <나도 루쉰의 유물이다-차오리화>의 주인공 '주안'처럼 자기 선언을 가진 사람은 삶을 사소하게 여기지 않는다. 삶에 진심인 사람이라는 뜻이므로 그 삶은 고스란히 역사가 되어야 마땅하다. 역사는 '진짜'로 살아낸 사람들의 총합이니까.
"여기 실린 이야기들이 지금 행복한 사람에겐 삶의 확장을, 지금 불행한 사람에겐 삶의 깊이를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책날개)"
저자가 생전에 남긴 부탁의 말을 챙기며 <여자전>의 깊은 여운을 다시 한번 음미해 본다. 제한된 선택밖에 없지만 좌절하지 않고 길을 찾아간 일곱 여인은 결코 매몰되지 않았다. 거기서 우린 현재를 지키는 것과 미래를 꿈꾸는 것 모두가 품격 있는 삶의 태도란 걸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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