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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를 버티게 한 온기이자 연대가 된 배추적

김서령의 유작 <외로운 사람끼리 배추적을 먹었다>

by 오순미

엄마는 자그맣고 여성스럽지만 작은 체구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올까 싶을 만큼 강인한 분이었다. 불의는 바로 잡고 세운 계획은 이루고야 마는 분. 조용하면서도 분명한 삶을 살았던 엄마의 부엌은 젖은 곳과 마른 곳이 명확해 늘 반질거렸다.


엄마만의 독특한 장식을 위해 황치자나 물들인 통깨를 사용한 음식은 눈으로 먼저 먹는 '컬러푸드' 못지않았다. 김서령의 유작 <외로운 사람끼리 배추적을 먹었다>(2019년 1월 출간)를 읽으며 윤기와 정성이 고인 엄마의 부엌에 와 있는 듯 착각이 일었다.


▲ <외로운 사람끼리 배추적을 먹었다>를 읽다가 그녀를 추모하는 마음으로 부친 배추적


배추적을 먹으며 "에이 뭔 맛이 이래? 싱겁고 물 맛만 나네!(17쪽)" 하면 자기 속이 생속(아픔에 대한 내성이 부족하다는 뜻)이라는 고백이란다. 속 좀 썩어본 사람끼리 먹는 것이 배추적이라고 입을 연 김서령의 <외로운 사람끼리 배추적을 먹었다>는 경북 안동 의성 김 씨 종부인 어머니 레시피와 그 안에서 성장한 그녀의 경험이 반영된 음식 에세이다. 음식으로 삶을 말하고 문장으로 마음을 보듬는 자전적 에세이기도 하다.



봄 햇장처럼 우러나는 그녀만의 세계


수려한 문장으로 전통 음식을 전하고, 그 음식에서 꺼낸 사적인 감정을 독자에게 개방한 책에선 제사와 가족, 여성의 노동과 외로움을 솔직하게 풀어간다. 그녀만의 세계가 '부뚜막에 얹어둔 봄 햇장'처럼 우러나 마음을 데우고 쓸쓸함을 덜어내기에 충분하다.


엄마가 살아서 이 얘기를 읽었다면 동년배 여성의 삶과 그 부엌에 빠져 이해와 연대의 깊이가 남달랐겠다 생각하는 틈새로 엄마의 증편이 눈앞에 선했다. 기정떡 혹은 잔기지떡이라 부르는 증편은 귀찮은 과정을 거쳐야 입으로 들어오는 음식이다. "쌀가루에 막걸리를 부어 미리 발효한 탓에 살짝 신맛이 났다"(173쪽)는 증편의 맛을 그녀의 어머니는 안동 버전으로 '새근하다'고 표현했다.


새근하고 폭신한 여름 떡이 변치 않도록 반죽 위에 색색의 꽃잎을 놓는 일은 저자의 몫. 어린 손이 거드는 일이 오죽했을까. 하지만 성가시다 생각지 않은 어머니에게서 바쁜 중에도 그녀를 홀로 두지 않겠다는 마음이 훤히 보였다. 그것은 어머니의 외로움이 투영된 절실한 보살핌으로 다가왔다.


"연변을 아시나요?"(195쪽)


작가는 우리에게 재촉하듯 묻는다. 우연히 배달된 '안동 방언집'에서 눈에 띈 '연변'은 아무도 쓰지 않아 그녀도 혀 위에서 치워버린 말이다. 40년 동안 한 번도 쓰지 않은 그 말이 옛 기억으로 향하는 문을 열어주어 연변 냄새 자우룩한 안동 집 마당으로 격렬하게 달려간다.


입에 착 달라붙는 팥소 가득한 '연변(수수나 찹쌀 부꾸미에 가까운 밀가루떡)'을 미리 먹고 싶은데 그럴 수 없던 어린 그녀는 그만 울음이 터졌다. 제사에 올릴 음식은 산사람이 결코 먼저 건드릴 수 없는 신성한 것이기에 어머니도 어찌해 볼 도리가 없긴 마찬가지.


종부의 사슬에 묶여 제사 전엔 제 자식 입에 연변 하나 넣어주지 못했던 어머니는 정작 살아 있는 사람의 마음이 소외된 의례가 무슨 소용일까, 한 번쯤 질문해보지 않았을까. 마음보다 의례, 사람보다 형식이 더 중요했던 시절의 울음은 옅어지고 희미해졌으나 그녀는 더 이상 연변을 먹을 수 없게 되었다.



서럽고 외로운 아버지의 부재를 그리움으로 품다


시들한 시간에 신명을 더한 안동 종갓집만의 전통 음식 사이로 한두 문장씩 내비친 어머니와 고모의 슬픈 서사는 시큰하고 애처로웠다. 부재중인 남편들을 대신하여 어머니는 의성 김 씨 종부로, 고모는 광산 김 씨 종부로 일생을 시댁 식구 봉양하며 수많은 제사상을 홀로 차렸다.


그녀는 고단하고 외로웠을 두 여인의 일생을 쑥을 뜯으며 어루만졌다. 다들 허리 한 번 펴지 못하고 힘겹게 살았지만 봄볕 속에 쑥을 캐는 한나절을 해마다 몇 차례씩 누린 것만으로도 인생은 응분의 위엄을 획득한 것 아니냐는 그녀만의 발랄한 방식으로.


그런 그녀에게도 오래된 냄비의 눌은 자국처럼 지워지지 않는 강렬한 설움이 하나 있다. 어릴 적 연변이 먹고 싶어 울음이 터진 이유 중엔 아버지의 부재에서 오는 헛헛함도 있었다고 고백한 것처럼 그녀에겐 오로지 내 편이 되어 줄 남자어른의 실팍한 품이 간절했으나 끝내 가질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아버지의 부재를 원망으로 드러내기보다 그리움이라는 결로 보여주었다. 그래서였을까? 속이 썩을 대로 썩은 어머니가 혼자 견뎌야 했던 세계까지 일찍부터 알아채고 연민과 이해의 눈길로 감쌀 수 있었던 것이.



향과 맛이 살아있는 그녀의 문장 테라피


아버지의 빈자리로 늘 차가웠던 사랑채 대신 어머니의 삶과 손길에서 그녀의 생생한 문장력은 한없이 돋보인다. 익숙한 음식도, 생경한 삶도, 시선에 닿은 사물이나 풍경에 이르기까지 저자의 손길을 거친 문장은 '헐 · 대박 · 미쳤다'에 모든 표현을 가둔 시대에서 홀로 눈부셨다.


한 숟가락의 맛, 익어가는 소리, 오래된 부엌의 공기까지 따뜻하게 써 내려간 문장은 섬세하고 빼어났다. 포장하지 않은 문장은 향과 맛이 그대로 드러나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글 쓰는 사람으로서 반드시 닮고 싶지만 언감생심 뛰어넘을 수 없는 독보적인 '넘사벽' 앞에 그저 읽고 다시 읽으며 새겨볼 뿐이었다.


겨울 냉이는 제 몸을 있는 대로 낮춰 바닥에 납작 엎드린다. 빛깔도 모조리 지워 얼어붙은 땅 빛을 띤다.(72쪽)

나는 배를 깔고 바닥에 엎드려 갈비뼈와 명치와 배꼽에 닿는 구들장의 뜨거움에 쓸쓸해지려는 마음을 지졌다.(135쪽)


이렇게도 단단하고 매끈하면서 깊숙한 그녀의 문장은 곳곳에서 무시로 등장한다. "김서령의 글은 내게 흉내 내고, 뛰어넘어야 할 전범이자 지향점이 되었다"는 북칼럼니스트 김성희의 전언처럼 높고 고결한 경지였다. 접하는 것만으로도 치유적인 힘이 스며드는 '문장 테라피'였다.


탁월한 문장가인 그녀가 인물 인터뷰의 마력에 빠져 잡지 <샘이 깊은 물>에서 인터뷰 칼럼을 쓸 때다. 그녀는 얄팍한 호기심으로 비치지 않도록, 아픈 기억을 헤집지 않도록 인터뷰이의 사정을 살피면서도 깊이 몰입했던 기자로 유명했단다. 어머니의 외로움을 헤아리듯 인터뷰이의 마음을 진심으로 살폈기에 읽는 이가 공감하는 글을 쓸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이 책을 통해 충분히 납득할 수 있었다.


천생 글쟁이로 살아야 할 운명이었던 김서령의 <외로운 사람끼리 배추적을 먹었다>는 2018년 영원한 안식을 찾아 떠난 후 나온 마지막 책이다. '한 문장'은 졌지만 이제라도 동시대를 살았던 걸출한 문장가를 만난 걸 다행이라 여기며 그녀의 융숭한 문장이 빼곡한 세월을 찬찬히 따라가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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