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린 여자의 오기 충천

멈추고 싶은 생각 4

by 오순미

'십만양병론' 율곡의 뜻에 따라 살뜰히 모은, 우여곡절 끝에 남편의 거래처에서 받아낸, 은행에서 꾼 자금을 끌어다 억지로 집을 장만했다. 빚에 허덕이지 말고 규모에 맞게 살까도 했지만 이내 마음에서 굴절되었다.


우리 나라 집값은 잔잔한 바닷 속 성난 파도다. 언제 어떻게 훌리건으로 나타나 난동을 부릴지 예측할 수 없다. 집없는 설움까지 당하지 않으려면 무리수를 둬서라도 쟁취해야 했다. 빚도 능력이라고 하는 말 인정하지 않았으나 그땐 무슨 오기가 충천했는지 은행 금고를 내 창고처럼 여겼다. 두 방법 모두 불편한 건 마찬가지라 차라리 내 집에서 불편하자고 마음을 굳혔다.


상해의 늙은 거지가 '은전 한 닢 (피천득 수필)'이 갖고 싶었던 것처럼 나도 집 하나를 꼭 가져야겠어 비늘이 벗겨져라 살아보자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경제에도 투자에도 문외한이지만 집은 무조건 자가여야 한다고 고막을 찌르는 내적 소리에 가만히 동조했다. 그러고는 은행 자금을 뭉텅 가져다 경매로 넘어간 그 아파트 그 동 그 라인의 다른 집을 사들였다.


'하필이면 왜?'

가 따라붙어 마음이 따끔거렸지만 그 동네에선 그것밖에 차는 게 없었다. 하던 일을 놓을 수 없어 다른 지역은 생각하지 않았다. 이사하면서 굳이 내 사정을 까발릴 것까지 없는 이들에게 뭐라 답해야 하나 고민했지만 그땐 그 선택이 최선이었다.


이사 후 염려와는 달리 이유를 물어 난처하게 하는 사람은 없었다. 남의 일에 크게 관심이 없는 일 수도 있고 대답하기 곤란한 사정을 미리 눈치채 예의를 갖춘 것일 수도 있다. 솔직하게 말하기도, 돌려 말하기도 구차해 마음이 무거웠는데 묻는 이가 없어 다행이었다.


망연자실을 혹독하게 배운 후

'성실하게 살아도, 남에게 해끼치지 않아도 세상이 뒤통수를 치는구나'

는 아이러니가 문장처럼 새겨졌다.


도덕 교과서가 다 무슨 소용,

'이제부터는 내키는 대로 살 거야.'

마음에 대고 누차 공지했지만 절약, 절제, 자기검열 따위의 축적된 의식이 지속적으로 주변을 기웃거렸다. 헛짓이라고 빈정대면서도 그들을 끌어 안고 내 삶의 근간을 채우려 했다. 덜 성실해도 덜 절약해도 호통칠 이 없건만 나도 모르는 새 염기서열에 각인된 것들이 단호하게 통제다.


책정된 비용 안에서 부족한 듯 살아도 먼 길에 쉼표 하나 찍은 터라 남은 길은 그리 숨차지 않을 거라고 다독여 나갔다. 통장 잔고는 은행 등쌀에 홀쭉했지만 마음에 붙은 항체까지 훑어가진 못했다.


끈덕진 남편이 오랜 시간 끌어온 소송에 매달려 우리 가족을 후려 갈긴 업체와 싸운 끝에 고된 일상은 점차 회복되었다. 흔들림 없이 묵묵히 자신을 지키고 가족을 이끈 남편의 속내를 알게 된 건 나중 일이었다. 낙과가 지나가는 수레에 뭉개진 것처럼 남편의 자존심도 쑥대머리가 되었지만 가족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 하나로 혼탁한 시간을 버텼다고 했다.


사소한 근심에도 소화의 질이 떨어지고 불면과 싸워야 하는 나를 알기에 난한 과정을 시시콜콜 나눌 수 없어 더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 줄 알면서도 그 입만 바라봤던 건 좀 더 나은 경과를 기대했던 탓이다. 그것을 알면서도 입을 열지 않은 건 되어 가는 과정이 수월하지 않았던 탓일 게다.




기대하고 어그러지고 다시 기대하고 또 기다리는 지난한 과정은 가슴 속에 납 가루를 들이부었지만 배출 처리도 잊지 않았다. 다만 기다리는 힘이 약해질대로 약해져야만 그 시간의 낌새를 알게 된다는 점이 고약했다. '모든 것은 다 지나간다.'는 말이 허구는 아니지만 기다리는 과정이 얄궂은 건 사실이다.


내 시간에 오르막이 다시 기웃거리는 건 어림 반 닷곱도 없는 소리라고 부릅떠보지만 세상사가 내 소관이 아니니 알 수 없는 노릇. 면역이 생겼으니 손쉬우려나 싶다가도 견디고 버티는 거 더는 하고 싶지 않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인간사도 전 생애의 과정을 보면
기쁨과 노여움 슬픔과 즐거움이
지나가는 한때의 감정이다.

이 세상에서 고정불변한 채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세상 일이란
내 자신이 지금 당장 겪고 있을 때는
견디기 어려울 만큼 고통스러운 일도
지내 놓고 보면 그때 그곳에
그 나름의 이유와 의미가 있었음을 알아차린다.

출처 : 법정스님의 '모든 것은 다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