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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간택된 도시 울산

오랜만의 여름 휴가

by 오순미

더듬더듬 걸음마 시도하던 첫 아이 돌잔치를 르다.

북한 일인자 김일성 사망 소식에 대한민국 전군에 비상 경계령이 내려지다.

시청률 52%를 넘었던 메디컬 스릴러 드라마 'M'이 화제가 되다.(청순 가련형 심은하가 악역으로 출연해 야누스적 매력을 발산했던 공포 드라마)

통일의 염원을 담은 '서태지와 아이들'의 3집 앨범 타이틀곡 '발해를 꿈꾸며'가 발표되다.


첫 아이 돌잔치로 분주했던 1994년 여름은 살면서 처음 실감한 사상 최악의 폭염이었다. 남북정상회담 개최 예정으로 통일의 기대감에 술렁이다 북한 일인자의 돌연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전국은 혹독한 폭염에 겹쳐 초긴장 상태에 돌입해야만 했다. 그나마 공포 드라마 'M'을 시청하면서 잠시 시름을 잊고 등줄기에 오싹한 냉기를 느끼며 살인적인 더위를 지워 나갔다. 다행히도 전쟁의 위험이 사그라들면서 여전히 통일을 갈망하는 까닭에 '서태지와 아이들'의 '발해를 꿈꾸며'는 150만 장이나 판매되는 대히트를 쳤다. 와중에 돌잔치의 위력인지 아이는 아장아장 완벽한 걸음마를 자랑했다.




그동안 더위쯤은 선풍기와 수박 정도면 말끔히 해결되었다. 느티나무 그늘 밑 평상에서 배까고 부채질하면 도망치던 게 더위였으나 1994년 여름은 뜨뜻한 열기와 축축한 습기를 스팀세차기처럼 쏟아냈다. 촛농이 녹아내리 듯 줄줄 흐르는 땀이야 기본이고 밤에도 식지 않는 열기 때문에 열대야라는 말이 심심찮게 나돌았다. 가정용 에어컨이 대중화된 것도 1994년 폭염 사태 이후였다. 그 후로 여름은 오살나게 덥거나 환장하게 덥거나 둘 중 하나였다.

때문에 직장에서 일률적으로 주었던 8월 초 여름 휴가는 휴식의 의미라기 보다는 그야말로 혹서기 한가운데로 내동댕이 당하는 처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 왕성한 때라 떠나야만 완성된 휴가인 줄 착각해 망설임없이 늘 어딘가로 떠났다. 성수기를 틈타 바가지 요금과 불친절이 난무해도 기어코 집을 떠나 개고생을 감수했다. 아이들에게 경험의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더위도 무릅쓰고, 먼 거리도 마다 않고 떠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아이들이 중고등학교 들어가면서 여름 휴가는 거칠어진 숨통에 랄한 회칠을 하는 정도로 변형되었다. 그러다 올해는 실로 오랜만에 여름 휴가란 걸 보기로 했다.


숙소를 정하는 기준은 청결과 가성비. 신축이면서 가성비 훌륭한 숙소를 찾다보니 여행지는 울산으로 결정됐다. 울산은 수년 전에 다녀온 곳이지만 숙소를 정하면서 간택을 받은 도시가 되었다. 예전엔 어딘가로 떠나면 그 지역을 샅샅이 뒤져야 직성이 풀렸지만 이젠 느슨해야 해낙낙해낙낙 다닐 수 있다.


차창을 할퀴는 비를 뚫고 5시간만에 도착한 울주에서 언양식 불고기로 첫날의 허기를 채웠다. 잔꽃을 수놓 하얀 주머니에 다소곳이 들어 앉은 수저 올라왔다. 깔끔한 수저에 반해 음식이야 어떻든 일단 합격점을 주었다. 예상대로 나온 음식은 정갈하고 맛있었지만 가격 대비 불고기 양이 섭섭하게 나 좀 아쉬웠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 때문에 실내에서 관광할 수 있는 자수정 동굴나라로 차를 몰았다. 동굴 안으로 들어서자 머리칼을 곤두세울 듯한 냉기가 용의주도하게 파고들었다. 그럴 줄 알고 미리 가져간 두꺼운 카디건으로 촘촘하게 돋아난 소름을 진정시켰다.


자색빛을 머금은 자수정은 울주군 언양읍 일대에서 채굴되는 것이 한 때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보석이었다. 우리 나라보다 외국에 더 선호하던 보석이었으나 최근 들어 국내에서도 언양 일대 자수정에 대한 인식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서구에서는 보랏빛 자수정이 귀족 및 중세 시대 왕관의 장식, 종교계 사제들의 보석으로 사용되었다. 보석에 별다른 관심이 없 나에게 자수정의 가치는 새로운 눈을 뜨게 했다. 동굴 내부에는 자수정 원석들이 유리 부스 안에 보관되어 전시 중이었다. 보랏빛이 주를 이루었으나 백색, 황색, 회색까지 한데 어우러진 빛깔도 찬란했다.


언양 사람들은 예부터 집집마다 자수정 없는 집이 없을 정도로 흔해서 가치있는 보석인 줄 몰랐다던데 세계 5대 보석(다이아몬드, 사파이어, 에메랄드, 루비와 함께)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다이아몬드와 어깨를 겨눌 만한 보석이라니 의외였다. 그 사실을 알고 다시 들여다 보니 영롱한 보랏빛이 달리 보였다. 언양 자수정 광산도 추억 속에 웅크리지 말고 다시금 옛 명성을 찾아 세계의 자수정 시장을 장악할 자색빛으로 거듭나길 바라본다.

보랏빛 자수정


애주가 남편을 위해 큰애가 검색한 '복순도가'에 도착했다. 바람불어 우산까지 흔들리는 빗속에 발을 내딛성가셨지만 양조장이라기엔 꽤나 모던한 외관 마음이 쏠려 슬그머니 차에서 내렸다. 군데군데 놓인 갈빛 항아리의 정겨움을 느끼며 시음장으로 들어섰다.


코시국이라 내부에선 시음이 불가능하대서 막걸리 한 병을 사들고 나왔다. 시음하라고 따로 준 컵막걸리를 한 모금 마신 딸의 눈이 마름모가 되어 반짝 빛났다. 이런 게 막걸리라며 남편도 주억거렸다. 둘의 반응에 도대체 어떤 맛일까 한 모금 마셔본 후 "맘마미아!" 눈이 똥그래졌다. 탄산의 정도가 기존 막걸리에 비해 월등히 풍부해서 전통주지만 스파클링 와인이 떠오르는 게 여성을 위한 고급 막걸리 맛이었다. 달큰함이 깃든 막걸리에 톡쏘는 탄산(누룩이 발효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천연 탄산)과 적당한 산미의 조합이 탁월했다. 전통주 기법으로 만든 손막걸리 중 으뜸이었다. 운전 담당 아들은 맛이 궁금해 입맛만 다시며 숙소행을 서둘렀다. 다시 들어가 한 병을 더 산 후 '복순도가'와 작별했다.

복순도가 건물

끝낼 수 없는

시시포스의 영원한 노동처럼

올 여름 뜨거운 열기도

밤낮을 욱여넣은 채

사라질 줄 모른다.



202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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