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극의 감자전과 백구 사장과 고양이 가족

제주 그림 여행7

by MIA


M의 게스트하우스에는 정적만이 가득했다. 손님이 없는 날이라 넓은 거실에 방 두개가 딸린 독채를 나 혼자 쓰게 되었다. 조용한 게스트에는 두 마리 백구가 살았는데 이들 역시 조용했다. 짖는 법을 잃어버린 듯 백구들은 꼬리만 세차게 흔들어 댈 뿐이었다.






두 마리 백구가 내 눈엔 똑같이 생겼는데 M은 전혀 다르게 생겼다고 한다. 그런가? 다시 눈을 크게 뜨고 봐도 똑같다. 다음 날 떠날 때까지도 나는 둘을 구분하지 못했다. 지금 봐도 모르겠다. 이 애들 뿐 아니라 제주에서 본 하얀개는 모두 같은 혈통인지 다들 비슷하게 생겼다. 물론 애정어린 눈으로 자세히 오래 들여다보면 당연히 차이가 눈에 보일 것인데, 제주의 모든 개에게 애정을 품기에 2박 3일은 너무 짧았다.


깔금하고 아기자기한 거실 한쪽 벽면에는 만화책과 각종 신간이 가득했다. 시원한 거실에 앉아 제주의 바람을 느끼며 만화책을 보고 있자니 이것이 진정한 힐링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20세기 소년 - 지금 보면 약간 촌스러운 전개지만 추억을 되살리며 다시 정독



한참 만화책을 보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주변이 어둡다. 제주도의 밤은 급작스럽게 다가온다. M이 제주의 밤에 어울리는 제주 막걸리를 따고 감자전을 부쳐 낸다. 감자전은 입안에 넣자마자 스르르 녹아 없어진다. 내가 알던 감자전이 원래 이런 맛이었나? 지금까지 먹은 감자전을 감자전이라 부르는 건 감자에 대한 모독이다. 나는 이 감자전을 '궁극의 감자전'이라 부르기로 한다.


궁극의 감자전과 숙취없는 제주 막걸리


감자전과 제주 막걸리는 환상의 콜라보를 이루며 위장에서 춤을 춘다. 우리는 시시콜콜한 사는 이야기를 하며 부어라 마셔라 모드로 막걸리와 맥주를 먹어치운다. 술이 한참 들어가자 동생이 아껴놓은(?) 냉동 막창을 꺼내 구워준다.


그런데, 이 집 손님은 나 혼자가 아니었다. 어느새 고양이가 슬그슬금 다가와 뒷문에 동생이 놓아둔 고양이 밥을 야금야금 먹고 있다. 밥을 한참 먹다가 마루 밑을 향해 '야옹'하고 울자 기다렸다는 듯 새끼들이 우르르 기어나온다. 어미 고양이는 새끼 고양이들이 밥먹는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본다. 동생은 문앞에 매일 고양이들을 위해 밥과 물을 준비해 둔다고 한다. 고양이들은 늘 조용히 와서 밥만 먹고 간다고 한다.


"얘들아, 잘 기억해둬라. 여기가 엄마가 애용하는 맛집이란다. 주인장이 덩치도 크고 무섭게 생겼어도 착한 인간임이 틀림없으니 내가 없더라도 여기 와서 당당히 밥을 요구하거라."

어미는 새끼들에게 아마 이렇게 이야기하지 않았을까.


소문난 맛집에서 배불리 식사하는 고양이 가족


오랜만에 술에 취해 헤롱헤롱거리며 기분 좋게 잠들었다. 아무래도 내가 술을 마시는 이유는 딱 하나인 것 같다. 취기가 잔뜩 오른채 침대에 눕자마자 꿈같은 잠에 바로 빠져들기 위해서. 그 순간은 뭐라 설명할 수 없이 달콤하다.




혼자 독방처럼 사용한 2인실


다음날은 어쩐지 새벽 4시에 눈이 번쩍 떠졌다. 막걸리는 마셨는데도 숙취가 하나도 없이 멀쩡하고 다시 태어난 듯 머리가 맑았다. 이것이 제주도 막걸리의 힘인가? 제주도 청정 자연의 위대함인가? 누구나 제주도에서는 이렇게 깨끗하고 맑은 정신으로 아침을 맞이하는 것인가?

새벽에 일어난 자 답게 나는 자기계발 베스트셀러 '미라클 모닝'을 읽었다. 아침 4-5시쯤 일어나서 책을 읽고 운동을 하고 긍정적인 말을 외치는 행동을 습관화하면 성공한다는 뭐 그런 내용이었는데, 앉은 자리에서 단숨에 읽고 '아, 나도 이렇게 건실한 아침형 인간이 되어봐야겠다' 결심했다. 그러나 결과는...다들 짐작하시는대로다. 자기계발서의 효과는 세 시간도 못 간다. 그래서 자기계발서는 우울할 때 읽으면 좋다. 기분전환도 되고 비록 일시적일지라도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긍정적인 마음가짐이 드니까.


책을 다 읽고 거실로 나가자 창 밖으로 백구들이 보였다. 한 놈은 단잠에 빠져있고 한 놈은 어쩐지 우수에 젖어 있었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그림에 담았다.



개피곤한 자와 멍무룩한 자




그림은 게스트하우스에 남기고 왔다



9시쯤 동생이 조식을 차려왔다.

당근청이 올라간 토스트와 해시포테이토와 병 샐러드. 이대로 여기 눌러앉아 만화책이나 보고 삼시 세끼 차려주는 밥을 먹고 싶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그런데 주인 입장에서 그런 손님은 싫을 것 같다. 청소도 못 하게 밖에 나가지도 않고 거실을 차지하고 뒹굴거리는 손님이라니!



웃는 얼굴이 조금 무섭지만 맛있었던 조식



아침을 먹으러 온 고양이에게 인사하고 백구들을 쓰다듬어 주고 동생과 나는 길을 나선다. 김영갑 갤러리에서 오늘의 일행을 만나기로 했기 때문이다. 일행은 나에게 제주도에서는 김영갑 갤러리에 꼭 가봐야 한다 했다.

왜일까? 김영갑이 누구길래, 도대체 어떤 사연이 있길래?

어쨌든 우리는 김영갑 갤러리를 향하여 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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