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그림 여행 8
김영갑 갤러리에 가기 앞서 동생이 도민만 아는 작은 오름에 가보자 했다. 나는 그전까지 대부분의 육지 사람처럼 오름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오름은 화산에 의해 생성된 것으로 산의 제주방언이다. 그러니까 산을 올라가다 보면 분화구처럼 푹 파인 곳도 있고 그저 넓은 언덕 같은 곳도 있는 제주도에서만 볼 수 있는 특수한 지형이다. 아무리 이렇게 설명해도 오름에 가보지 않은 자는 그게 무언가 싶을 게다. 오름은 직접 올라가 봐야만 느낄 수 있다.
오름에 올라 저 멀리 보이는 제주 풍경도 감상하고 시원한 바람에 땀도 식혔다. 오름에 올라 나는 생각했다. 오름은 단순한 언덕도 아니고 산도 아니고 그저 오름이라는 말로밖에는 설명되지 않는다. 오름은 오름이다.
의도치는 않았지만 이 오름에 오른 건 그 날의 중요한(?) 복선이 되었다. 왜인지는 김영갑 갤러리에서 밝혀진다.
오름에 올랐다 내려오니 금방 배가 고파졌다. 우리는 초록색 검색창의 도움으로 표선면에 위치한 제주도민만 아는 맛집이라는 두루치기 집을 찾았다. 동생이 제주도 두루치기는 육지의 것과는 사뭇 다르다 한다. 우리는 그 맛집이 있는 '가시리'면으로 향했다.
식당의 손님들은 우리를 제외하고 모두 제주도민들 단골인 듯 제주방언으로 주인 분과 친근하게 이야기를 나눴다. 관광객은 한 명도 없는 푸근한 광경에 제대로 도민 맛집을 찾아왔다는 확신이 들었다. 제주 두루치기는 과연 달랐다. 불판이 먼저 등장하고 양념된 고기가 올라가고 그 위에 콩나물, 파무침이 잔뜩 올라간다. 콩나물 불고기와 비슷한 모양새이긴 하지만 맛은 전혀 달랐다. 맵지 않은 양념과 고기와 파무침이 잘 어우러져 환상적인 맛을 냈다. 정갈한 반찬과 내가 사랑하는 몸국에 밥까지 이 모든 게 일일분에 단돈 6천 원이라는 사실! 이렇게 저렴하고 소박하고 맛 좋은 음식이 진짜 제주도 음식이구나, 감탄마저 들었다. 어쩌면 관광객은 관광객들만 가는 맛집 위주로 다니기 때문에 제주도 음식이 비싸다고 느끼는 것 아닐까? 이런 진짜 제주도 맛집이 많이 알려졌으면 싶다가도 관광객이 들끓어 가격이 올라가고 맛이 변하는 건 싫으니까 알려지지 말았으면 하는 심정이 된다.
점심을 배불리 먹고 나서 우리는 드디어 김영갑 갤러리로 향했다. 동생도 김영갑 갤러리가 참 좋다고 꼭 가봐야 한단다. 도대체 김영갑 갤러리에 뭐가 있길래? 나는 여전히 의문을 안고 김영갑 갤러리로 향한다.
김영갑 씨, 당신은 누구입니까?
김영갑 갤러리는 입구에서 우울하게 생긴 인형이 우리를 맞아주었다. 자세히 보면 치마에 '외진 곳까지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쓰여있다.
아기자기한 정원 나무 사이사이에 귀엽고 익살맞은 동상이 하나씩 자리 잡고 있다. 고요한 정원을 돌아보자니 어쩐지 마음이 편안해진다. 경건함마저 느껴지는 이 차분한 분위기가 왠지 낯익다 했더니, 옛 폐교를 개조해서 만든 곳이라 한다. 어쩐지 정원에는 방과 후 텅 빈 학교에서 느껴지던 왠지 모를 쓸쓸함과 아련함이 어려있었다.
갤러리 내부는 아주 작았고 전시된 작품도 몇 점 없었다. 김영갑은 생전에 제주의 오름을 너무나 사랑해서 오름을 아주 집중적으로 찍었다고 한다. 그의 사진에는 군더더기가 없었다. 주변의 쓸데없는 것을 모두 생략하고 오로지 주인공인 오름만을 찍은 사진들은 충격적으로 아름다웠다. 그는 오름에 미쳐서 수년간 사시사철 오름만 찍었다 한다. 돈이 되는 일도 아닌데, 그는 대체 무엇을 먹고살았을까? 갤러리에 있던 안내서에 따르면 그는 배가 고프면 밭에서 나는 무나 고구마 따위를 주워 먹었다고 한다. 제대로 먹거나 잠을 자지 못한 세월 때문인지 혹은 운명의 장난인지 그는 거짓말처럼 루게릭 병에 걸리고 말았고, 그렇게 희귀병으로 투병하다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그가 남긴 사진들은 갤러리에서 매일 수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그가 생전에 바라던 것도 이런 것 아니었을까? 자신이 본 아름다운 오름을, 제주의 풍경을, 다른 사람도 같은 눈으로 봐주는 것. 그가 세상에서 사라지고 없더라도 아주 오랫동안 사진만은 살아남아 사랑받기를.
나는 그에게서 고흐를 떠올렸다. 속세를 등지다시피 하면서 자신이 사랑한 것에 전부를 걸고 쓸쓸히 살다 간 예술가. 죽은 뒤 작품으로 불멸을 누리는 불운 했지만 행복했던 사나이. 속세의 기준에서 보면 고흐나 김영갑이나 쓸데없는 짓만 하다 삶을 탕진해버린 사람들이다. 그러나 예술이라는 게 삶의 희생 없이는 이룰 수 없다. 어쩌면 예술은 삶을 갉아먹으면서 목숨을 유지하는 기생충 같은 것이다. 삶을 윤기 나게 유지하면서 예술적 이상도 지킨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나는 이제 안다. 아무나 갈 수 없는 길을 걸었기에 고흐와 김영갑의 삶과 작품은 우리에게 큰 울림을 넘어 충격마저 주는 것이다.
김영갑 갤러리 앞에서 나와 동생은 헤어졌고, 나는 일행을 기다리려 갤러리 앞의 카페로 갔다.
때는 이른 6월이라 종달리 길에도 수국이 별로 피지 않아 아쉬워했는데, 이 카페의 정원에 수국이 가득 피어있는 게 아닌가. 수국이 만발한 정원에 놓인 벤치는 어서 여기 앉아 사진을 찍으라고 유혹하는 것만 같았다.
일행을 기다리느라 우연히 들어간 카페에서 나는 예쁜 수국도 보고 그림도 그리며 여유를 가졌다. 한 시간 남짓한 기다림이 전혀 지루하지 않았던 건 물론 그림 덕분이다. 그림을 그리면서부터 내게는 기다리는 시간, 빈 시간은 짬 내어 그림 그릴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이 되었다. 특히 여행 중에 잠깐 카페에 들러 커피를 마시며 그림 그리는 순간에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행복이 밀려온다. 특히 그 카페가 아름다운 자연을 벗 삼아있는 경치 좋은 곳이라면 행복은 두 배 세 배가 된다.
수국 수국 한 촉촉한 하루가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