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그림 여행 9
일행과 나는 저녁으로 사촌동생 M이 추천한 고기국수를 먹기로 했다. 동생의 말에 따르면 보통 관광객들이 찾아가는 대표 고기 국숫집은 00 국수와 00 국수는 맛집도 아니라는 거다. 내 기억으로는 맛만 좋았는데 그것보다 더 맛있는 고기국수집이라닌 기대가 아니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미 그 고기 국숫집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우리도 이름을 올리고 번호표를 받았는데, 무려 한 시간 가까이 기다려야 할지는 몰랐더랬다. 기다림이 길어지며 '맛없기만 해봐라'하며 이를 갈았는데(?) 드디어 고기국수를 받아 들고 두툼한 고기와 진한 국물을 한입 먹어보자마자 분노는 사르르 녹았다.
그 날 저녁에는 고기국수에 제주 땅콩 막걸리를 곁들여 배불리 먹고 잤다. 그런데 다음 날 새벽 5시 반에 또 눈이 번쩍 떠졌다. 아무래도 제주 막걸리에는 아침부터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뭔가 있는 게 틀림없다!
어쨌든 나는 일행이 깨지 않도록 그림 도구를 챙겨 들고 살금살금 호텔방을 나갔다. 거리에는 개미 한 마리도 없었다. 저 멀리 보이는 성산일출봉은 안개에 싸여 있었고, 새벽 공기는 축축했다. 나는 멍하니 앉아 있다가 눈 앞에 보이는 풍경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림을 그리고 있자니 등산복을 입은 할머니들이 한 두 분 등장했다. 바삐 걷는 것으로 보아 운동을 나오신 모양이다. 덕분에 혼자라는 무서움이 조금 가셨다. 할머니들은 길가다 서로를 만나면 알은체를 하며 잠깐의 만남에도 무척 반가워했다.
그중 어느 두 할머니의 대화, 한 할머니가 다른 할머니에게 인사하며
할 1 : 아이고, 어제는 안 나왔대? 내가 자네 만날라고 일부러 이 시간에 운동 나오잖아.
할 2: 어제도 나왔는데 왜 못 봤지?
할 1: 암튼 하루 못 봤는데 반갑구먼, 히히!
두 분은 내 옆에 앉아 시시콜콜한 사는 이야기를 한참 나누시다가 각자 갈 길을 갔다. 잠깐의 대화 속에 묻어난 진한 외로움이 느껴졌다. 아마 할머니 1은 하루 종일 대화할 사람 없이 정적 속에 사는 건 아닐까? 그래서 친구를 만나려 일부러 친구가 다니는 시간에 맞춰 운동을 나오고, 그 짧은 순간 이산가족이라도 만난 듯 반가워서 호들갑을 떨게 되는 것일까... 쓸쓸하고도 다정한 할머니들의 만남은 이렇게 매일 계속되겠지.
시간이 흐르며 점점 더 많은 주민들이 거리에 나타났다. 천편일률적인 등산복 차림 가운데 반짝이는 꽃무늬 몸빼바지에 빨간 운동화와 스냅백을 세트로 장착한 할머니는 단연 그 거리의 패셔니스타였다.
벤치에 앉아 한참 그림을 그리는데, 쓰레기봉투를 든 한 무리의 어르신들이 나타났다. 집게를 들고 거리의 쓰레기를 줍는 자원봉사단쯤 되어 보였다. 그중 집게를 든 한 할아버지가 나에게 대뜸 "쓰레기 버리지 마." 하며 반말을 하는 게 아닌가. 나는 잠시 내 귀를 의심했지만 별 다른 대꾸 없이 가만히 있었다. 내가 쓰레기 버릴 사람처럼 보이나? 물감을 닦느라 의자에 휴지를 올려놓았는데 아마 그걸 보고 잠재적 쓰레기 투기꾼이라고 생각했는지, 혹은 모든 관광객은 쓰레기 투기꾼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를 일이다.
내가 아무 말도 없으니 할아버지가 또다시 "쓰레기 버리지 말라고!"라고 또 반말을 하였다. 나는 성질을 못 참고 "쓰레기 안 버려요!"라고 앙칼지게 대답했다. 그랬더니 할아버지 얼른 걸음을 옮기시더라. 나는 겉으론 순해 보이지만 누가 나를 건드리면 나도 꼭 그에 상응하는 반응을 하고야 마는 못된 성격이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어른한테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초등학생 나무라는 듯 반말이라니! 쓰레기를 아무렇게나 버리는 관광객에 대한 불만을 만만해 보이는 나에게 터트린 건가 싶기도 했다. 이 사건으로 평화로웠던 아침 산책과 스케치의 기억이 나쁘게 마무리될 뻔했다.
호텔로 돌아가는 기에 내 마음을 달래준 이들을 만났으니 다리 아래 공터에 묶여있는 두 마리 백구였다. 다시 한번 제주개에 대해 말하자면 제주개는 1. 하얗고 2. 귀엽고 3. 순하다.
백구들은 나를 발견하고는 둘이 동시에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내가 무언가 맛난 간식이라도 던져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내가 움직이면 움직이는 대로 고개를 움직이며 꼬리를 흔드는 모습이 정말 귀여웠다.
귀여운 백구 형제 또는 자매 또는 남매
그렇게 한참 백구들과 눈으로 대화를 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자유로운 영혼의 백구 한 마리가 나타났다. 개는 나에게 바짝 다가와 눈을 반짝이며 쓰다듬어 달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커다란 개에 대한 공포심이 있어 아무리 순해 보여도 섣불리 만지지 못한다. 내가 가만히 있으니 실망한 백구는 다리 아래로 내려가 묶여있는 형제들에게 다가갔다. 백구끼리 통하는 뭔가가 있는지 셋은 서로를 반기며 무어라 한참 대화를 주고받는 듯했다.
호텔로 돌아가서 다시 한잠 자고 일어나니 아홉 시였다 우리는 아침으로 문어라면을 먹으러 갔다. 일행이 전에 가 봤다며 강력히 추천한 집이었다. 작은 가게에 손님(물론 관광객)들이 가득 찬 걸 보니 맛집이 틀림없어 보였다. 하지만 라면에는 문어가 빠졌다 나간 흔적밖에 없고, 오징어가 그 빈자리를 꽉 채운 사실상 오징어 라면이었다. 그런데 메뉴에도 '문어라면'이 아닌 '해물라면'이라 쓰여있으니 속인 건 아니다. 문제라면 단지 해물라면을 문어라면으로 잘못 기억한 일행 H의 몹쓸 기억력인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