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그림 여행 10
라면으로 해장하고 주변을 둘러보는데 성산일출봉이 바로 앞에 있었다. 그 앞에 차를 세우고 잠시 성산일출봉을 그려보았다. 그리다 보니 흐린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졌다.
성산일출봉을 그리다 보니 자연을 묘사하는 게 새삼 어렵게 느껴졌다. 자연 지형은 단 한 군데도 직선이 아니다. 온통 울퉁불퉁하고 완만하다가 경사지는 등 제 멋대로다. 하나도 똑같이 생긴 나무가 없으며 바위나 돌도 다 색깔이 다른다. 제각각이고 제멋대로이고 예측 불가한 자연은 볼 때마다 새롭다. 자연은 그래서 쉽게 질리지 않는다.
빗발은 점점 거세졌다. 제주도에선 비가 오면 뭘 해야 하나? 고민하다 우리는 제주 해녀 박물관에 가기로 했다. 결과적으로 탁월한 선택이었다. 아무런 기대 없이 간 곳이지만 안 가봤으면 어쩔 뻔했나 싶을 정도였다.
해녀 박물관은 규모가 크고 깨끗한 신식(?) 건물로 해녀의 삶, 해녀의 일터, 해녀의 생애를 주제로 전시관이 구성돼 있었다.
해녀들이 불을 피워 몸을 말리는 장면 & 해녀 밥상
가장 인상적이었던 전시는 해녀 할머니들의 경험담을 육성으로 들을 수 있는 영상관이었다. 한 할머니는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 등 떠밀려 캄캄한 바닷속으로 들어갈 때마다 무서워서 그렇게 울었다고 한다. 아이를 출산하고 몸조리도 못한 채 물질을 나설 때면 그렇게 서러울 수가 없었다는 담담한 할머니의 목소리 위로 한이 서린 해녀들의 노래가 흘렀다.
해녀들은 제주 경제를 살린 건 물론 일제시대에는 항일 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제주의 역사란 해녀들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물관을 죽 둘러보며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해녀들이 안팎으로 종횡무진 활동하며 제주를 먹여 살리는 동안, 남자들은 무얼 했을까? 어디에도 제주 남성의 역할에 대한 설명이 없다. 3층에 전시된 사진전에서 그 해답을 찾았다.
근육으로 단련된 인상적인 해녀의 옆에 그녀를 돕는 남자가 보인다. 사진 설명에는 '남편은 아내를 기다려 채취한 해산물을 옮기는 것을 돕는다'라고 되어 있다. 해안가에서 젖먹이를 안고 있다 아내가 물 밖으로 나올 때를 기다려 젖을 먹이기도 했다고 한다. 그 밖에 남자들은 해산물을 옮기는 등 힘쓰는 일을 했을 거라고 추측해본다.
우리가 평소 박물관이나 기념관에 만날 수 있는 인물은 위인전에 등장하는, 어떤 업적을 세운 알려진 인물이지만 해녀 박물관의 주인공은 이름도 모르는 해녀들이다. 그것도 특정한 몇몇의 해녀가 아닌 해녀 모두가 주인공인 박물관이 세상에 또 있을까? 아무런 기대 없이 비를 피하고자 들른 해녀 박물관은 사람이 주인공인 박물관이라 더 감동이 깊었는지도 모른다.
3층 전망대에서는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 보였다.
평화로운 마을을 그리며 잠시 머무르자니 어느새
비가 그쳤다. 자, 이젠 또 어디로 가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