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으로 그린 생각
새벽 5시, 고양이 루이가 여느 때처럼 목청이 쉬어라 울며 나를 깨웠다. 나는 루이에게 열 번쯤 고함을 지르고 짜증을 낸 후 결국 아침잠을 포기하고 일어났다. 새벽에 일어나 글을 쓰라고 신이 내게 고양이를 보낸 것이리라. 커피 물을 올리고 멍한 머리에 시동이 걸리길 기다리며 멜론을 켜서 '비올 때 듣는 우울한 팝송' 모음을 들었다. 콜드 플레이, 샘 스미스, 킹즈 오브 컨비니언스...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새벽에 어울리는 노래가 차례로 흐르고 라디오헤드의 'No surprises'가 나왔을 때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대학 시절의 'RT'라는 모임이 떠올랐다.
RT는 Rain + Tea 의 줄임말로 비가 오면 모여서 차를 마시는 그야말로 시간 많던 대학생 새내기 시절의 한량 같은 모임이었다. 구성원은 친했던 남자아이와 그 아이가 데려온 여자아이와 나, 우리 3인조는 비가 오는 날이면 낭만적인 기분에 휩싸여 수업을 째고(그 시절 우리는 수업을 짼다고 표현했다.) 학교 근처의 어두컴컴한 커피숍에 둘러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십 년도 더 된 일이니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생각나지 않지만, 이름도 잊은 그 여자아이가 자는 시간이 너무 아까워서 밤에 잠을 잘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한 것만은 기억이 난다. 자는 시간을 아껴가며 무언가를 해 본적도, 하고 싶었던 적도 없던 나에게 굉장히 충격적인 말이었다. 잠자는 시간, 자면서 꿈꾸는 시간을 무엇보다 좋아하던 일명 잠탱이였던 나로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RT 모임은 세 번 인가 네 번의 모임을 끝으로 사라졌고, 그 남자아이와 여자아이도 내 인생에서 잃었던 수많은 사람들처럼 어느 틈엔가 자취를 감췄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 남자아이에 관해서다. 그 애를 C라고 하자. C는 유일하게 내게 친구하자고 다가온 남자 사람이었다. 열아홉에서 스무 살로 넘어가던 시절, 천지분간이 안 돼던 망나니 같고 순수했던 나는 남녀 사이의 우정이 당연히 가능하다고 믿었다. 그 애가 건넨 편지 속에는 사랑 고백이 아니라 '진정한 친구가 되고 싶다'는 말이 적혀 있었다. 나는, 우리는 우리의 우정이 그렇게 영원할 것이라 생각했다. 영원하진 못 하더라도 진정한 친구로 오랜 시간 곁에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은 우리가 우정을 쌓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나의 남자친구는 그의 의도를 의심했으며 나에게 베푸는 C의 친절한 행동에 주변 사람들은 이런저런 이름을 붙였고 억측이 난무했다. 어떻게 남녀 사이에 우정이 가능하니? 그 애가 아직 본색을 드러내지 않은 거야. 이건 이런 거고 저건 저런 거야. 네가 아직 몰라서 그래.......
A heart that full up like a landfill...a job that slowly kills you...bruises that won't heel
C는 여전히 내 곁에서 나를 위해주고 나를 지켜주고, 끝없는 우정을 베풀었지만 나는 어느 새 사람들이 내게 씌운 프레임에 갇혀 그들처럼 그를 의심하고 재단했다. 그는 달라진 게 없었지만 나는 그를 밀어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사이가 멀어진 뒤에도, 군대에 가서도 종종 편지를 보냈다. 무언가 멋진 걸 보면 - 바닷가의 일출이라던지 - 내게도 보여 주고 싶어 했다. 그 애는 어딘가에서 계속 신호를 보냈지만, 나는 신호를 무시하려 애썼다.
몇 년 전, 고향집에 가서 버리지 못한 편지 더미 속에서 그 애가 보낸 편지들을 발견했다. 그중 하나에는 이런 내용이 쓰여 있었다. '오늘 M이 그러던데 네가 표정을 잔뜩 찌푸리고 지나가는 걸 봤다는 거야. 네가 무슨 고민이 있어서 그랬을지 나는 걱정이 되었어...' 나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나의 표정 변화 하나에도 신경을 쓰고 걱정을 해주는 그 마음에, 이름을 굳이 붙이자면사랑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어른이 되면 모든 게 명확히 흑백으로 나뉘는 세계에 산다고 착각하게 된다. 그래서 우정이야 사랑이야? 너는 진보니 보수니? 우리 편이야 남의 편이야? 사실 사랑에는 증오도 있고 좋아하는 감정에는 질투도 섞여있는데, 우리는 감정을 규정하는 이름에 갇혀 다른 감정을 부정하고야 만다. A가 아니면 B. 이것이 아니면 저것. 명확한 지위로 설명되지 못 하는 관계는 어른들의 세계에서 추방당하고, 인간관계는 점점 관계 설정이 뚜렷한 범위로 좁아진다. 가능성을 열어두면 삶은 더 복잡해진다. 우리는 이름에 기대어 단순히 정리되는 관계에 안착하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I'll take a quiet life with no alarms and no surprises
그러나 세상에 이름 없는 사랑이 얼마나 많고, 규정하기 어려운 관계는 얼마나 흔한가. 오늘같이 비가 오는 날에는 이름을 가지지 못해 존재를 부정당하는 사랑을 한 번쯤 떠올려도 좋으리라.
I just want to see you laughing underneath the purple rain..
하늘에서 보라색 눈물을 흘리고 있을 것만 같은
프린스를 추모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