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에어가 하와이 호놀룰루 공항에 취항을 시작하며 하와이행 비행기표는 말도 안 되게 저렴해졌다. 나는 60만 원대에 왕복표를 샀는데, 인터넷 후기를 보니 날짜에 따라 40만 원대에 구한 사람도 있었다. 영화 '친구'의 그 유명한 대사, '니가 가라 하와이'가 더는 농담이 아닌 시대가 열린 것이다. 저가 항공이라 개인 모니터도 없고 담요나 음료수 술도 제공되지 않는다는 소식을 듣고 얇은 담요까지 바리바리 싸 짊어지고 갔다.
'지니'라 불리는 진에어 스튜어디스들은 연두색 셔츠에 스키니 청바지를 입고 날쌔고 경쾌하게 움직였다. 누구도 스키니 진이 작아 보이거나 답답해 보이지 않았다. 이 회사는 면접 복장이 스키니 청바지라도 되는 것 아닐까? 스키니 진을 입었을 때 위화감이 느껴지거나 어울리는 사람은 당장 탈락... 물론 이러진 않겠지만.
저가 항공을 타고 8시간을 날아가는 건 힘들지 않을까라는 염려는 기우였다. 오히려 모니터가 없는 덕분에(?) 오롯이 책 읽는 데 집중할 수 있었다. 기내에 불이 꺼지고 다른 승객들이 잠든 사이, 독서등을 켜고 음악도 없이 조용한 가운데 책을 읽는 기분은 경건하기까지 했다. 마치 어두컴컴한 독서실 칸막이 안에서 독서등을 켝고 공부하는 기분이랄까?
현대인이 가장 많이 하는 변명 중 하나인 '책 읽을 시간이 없다'는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기정사실이 됐다. 정말이지 우리는 책을 읽을 시간이 없다. 아니, 빼앗겨 버렸다는 표현이 더 맞다. 일을 하고 가사를 하고 아이를 양육해야 하는 일상에서 책 읽는 시간을 내기란 좀처럼 어려운데다, 여가 시간이 생길라치면 우리는 어느새 스마트폰으로 중요하지도 않은 뉴스, 가십을 확신하고, 얼굴 한 번 못 본 페친들의 안부를 확인하느라 여념이 없다.
이제는 이런 바쁜 일상에서,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8시간씩 - 밥 먹고 잠자는 시간을 빼면 물론 더 짧다 - 반강제적으로라도 독서에 몰두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는 비행기를 타는 것뿐이라는 생각마저도 든다. 물론 독서를 위해서만 비행기를 타는 건 만수르 정도의 부자여야 가능한 일이겠지만.
그 날, 가는 비행기 안에서 읽은 책은 <카모메 식당>으로 유명한 무레 요코의 <빵과 수프, 고양이와 함께하기 좋은 날>이었다. 오십 세의 독신 여성이 엄마에게 물려받은 식당을 운영하며 유일한 가족인 고양이와 함께 담담한 나날을 보내는 내용으로 너무 진지하지도 가볍지도 않은 잔잔한 재미가 있어 비행기에서 읽기에 딱 알맞았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 읽은 결말은 (스포일러 주의!) 고양이가 죽는 것으로 친구에게 맡기고 온 나의 고양이 루이가 생각나 눈물 콧물을 질질 흘리고 말았다.
두 번의 식사와 요가 타임, 그리고 퉁퉁 부은 다리를 진정시켜 주는 쿨링 로션까지 받고 나서 길었던 비행기 끝났다. 호놀룰루 공항에 도착해 숙소인 와이키키 해변 쪽으로 가는 내내 풍경은 환상적이었다. 높이 솟은 현대적 아파트와 호텔 사이로 결코 뒤지지 않는 위용을 자랑하는 키 큰 야자수와 이름 모를 나무들, 뜨거운 햇볕, 시원한 바람, 반쯤 수영복을 걸치고 플립플랍을 신고 경쾌하게 걸어 다니는 사람들. 그 첫인상은 강렬했고 너무 아름다웠다.
35층에 있는 숙소 창 밖에는 이런 풍경이 펼쳐졌다. 멀리 보이는 쪽빛 바다가 바로 와이키키.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내내 창 밖만 보고 있어도 질리지 않을 풍경이었다.
한국에 돌아와 그 풍경을 그려봤다. 물론 그림은 실제 풍경의 십 분의 일도 담아내지 못 한다.
그러나 기억 속의 아름다운 풍경을 그리는 동안 나는 다시 하와이의 햇살과 바람과 창 밖으로 보이던 그 날의 풍경 속에 다시 들어와 있는 것 같아서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