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그림 여행 2
원효대사의 깨달음으로 한바탕 웃고 난 후 조식을 먹으러 별관 카페로 갔다.
유럽의 어느 가정집 같은 게스트 하우스에서 차려준 아름다운 조식에 눈이 먼저 호강했다.
외관과 인테리어 조식까지 모두 유럽풍으로 일관되게 꾸며놓은 모습을 보니 게스트 하우스는 결국 콘셉트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텔의 푹신하고 편안한 침대를 포기하고 게스트 하우스로 가는 이유는 특별한 경험 때문 아닐까. 에어비앤비가 성공을 거둔 것도, 저렴한 가격이 아니라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누군가의 집에 머무른다는 경험 때문이니까. 숙소에도 나만의 스토리가 있어야 함을 다시 한번 느꼈다.
둘째 날 첫 번째 코스는 제주도에 오면 누구나 간다는 오설록 녹차밭이었다. 막상 가 보면 별 게 없어 실망한다는 그 녹차밭이지만 끝없이 펼쳐진 푸른 밭에 나는 감탄하고야 말았다.
해가 쨍쨍하고 그늘에 앉으면 시원한 바람이 부는 날이었다. 녹차밭을 바라보며 한참이나 앉아 첫 현장 그림을 완성했다. 여유롭게 그림을 그리고 또 안 먹으면 섭섭한 녹차 아이스크림도 먹고 기프트샵과 박물관을 둘러보고 나니 보통 이삼십 분이면 끝났을 관광코스에 한 시간 가량 머물렀던 것 같다. 그림을 완성하고 자리를 뜨는 순간 제대로 된 여행을 하고 있다는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도 그림을 그리던 순간의 시원한 바람과 녹차밭의 푸르름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다. 아마 인증 숏만 찍고 왔다면 이미 지금쯤 녹차밭은 기억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을 거다.
여행지를 그리는 일은 여행지를 머릿속에 정교하게 새겨 넣는 것과 비슷하다. 그림을 그리자면 한 템포 쉬어가는 느린 여행을 할 수밖에 없다. 주변 사물을 더 자세히 관찰하게 되고 오감을 이용해 느끼고 그 순간에 오롯이 집중하게 된다. 정신없이 무언가를 보고 인증숏을 찍는 여행은 사진이 남지만 느린 그림 여행은 여행이 남는다.
조금만 돌아다녀도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지는 제주도는 곳곳이 영화나 드라마 촬영지다. 드라마 '올인'의 촬영지인 송악산을 멀리서 구경했다. (그렇다. 나는 산은 멀리서 구경만 하지 굳이 올라가진 않는다)
그리고는 신성한 기가 느껴지는 산방산을 구경하러 갔다. 멀리서 보면 둥근 산 같지만 가까이서 보면 둥근 머리 아래로 깎아지른 절벽이 무너질 듯 위태롭게 형성돼 있다.
오랜 세월 그 자리에 서 있으며 오늘날의 모습을 형성한 산에는 분명 영혼이나 우주의 기운이 깃들어 있을 것만 같다.
평지를 보았으니 조금 높은 곳에 오를 차례였다. 중문단지 신라 호텔 정원에 있는 그 유명한 쉬리의 언덕으로 향했다.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바다 풍경에 감탄하며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김윤진이 앉아있던 벤치에 앉아 또 그림을 그렸다. 이번에는 녹차밭의 평화로움과는 정반대로 쉴 새 없이 얼굴을 때리는 칼바람과 싸워야 했다.
바람에 사정없이 두들겨 맞고 머리가 얼얼해진 채로 숙소로 향했다. 올레 시장 근처에 새로 문을 연 호텔이었는데 새 호텔답게 직원들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친절했다. 프런트에는 홍콩 영화배우처럼 생긴 직원이 있었는데 로비를 드나들 때마다 어찌나 자동으로 인사를 하는지 AI가 아닌가 잠깐 의심을...
이 호텔에는 특이하게도 옥상에 자쿠지가 있어서 사용할 수 있었다. 수영복을 입고 자쿠지에 들어가는데 남자 직원이 멀찌감치 서서 우리를 계속 주시했다. 안전 규정상 손님을 홀로 버려둘 수 없는 모양이 없다. 아무튼 그분의 부담스러운 시선을 느끼며 뜨거운 물에 몸을 담갔다. 사정없이 부는 바람 때문에 마치 파도치는 바다 위 요트에서 자쿠지를 하는 기분... 태양을 피할 그늘조차 없는 땡볕에서 바람에 시달리며 모자를 부여잡고 꽤나 험난한(?) 반신욕을 마쳤다.
바람은 그렇다 치더라도 파라솔이라도 있으면 좋을 것 같아 나중에 프런트에 문의해 보니 제주도 특성상 바람 때문에 파라솔이 날아갈 우려가 있어 일부러 설치하지 않았다고 한다.
아, 제주도는 역시 바람이 지배하는 공간임을 다시 한번 느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유명하다는 서귀포 올레시장으로 향했다. 걸어서 십분 남짓한 거리에 위치한 올레 시장은 정말 서울 촌사람 눈이 휘둥그레질 광경이었다. 이미 SNS에서 소문난 맛집은 줄이 끝이 없었고, 다들 손에 손에 먹을거리를 한 가득 들고 인증숏을 찍기 바빴다. 시장 기다란 벤치가 죽 늘어서 있단 점도 특이했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소문난 맛집 여사장님들의 얼굴에는 자부심이 그득했다. 결코 관광객에게 아첨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쌀쌀맞지도 않은, 품위와 푸근함 그 중간 어디쯤을 유지하는 제주 맛집 여사장님들의 포스는 너무나 멋진 것.
관광객 틈바구니에서 쟁취한 건 땅콩 만두, 모닥치기, 오메기 떡, 천혜향 주스였다. 모닥치기와 천혜향 주스만으로도 배가 작은 우리는 이미 포화상태. 나중에 숙소에 돌아가서 오메기 떡과 땅콩 만두를 먹었는데 만두도 맛있었지만 오메기떡은 정말 처음 맛보는 맛이었다. 이렇게 맛난 떡을 한평생 모르고 산 게 억울할 정도로.
배를 두드리며 호텔로 돌아와 우리는 체크인할 때 받은 바우처로 맥주나 한잔 가볍게 할 생각으로 레스토랑으로 갔다. 그런데, 역시나 이 호텔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극한 체험 자쿠지와 AI 요원으로도 우리를 놀라게 하긴 부족했다 판단했는지, 텅 빈 레스토랑을 무료하게 지키던 어린 웨이터가 바우처를 보더니 '음료수 제외, 핫도그와 가락국수만 제공'이라고 말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대식가가 아니고 동행 역시 평범한 위장의 소유자다. 그러나 우리는 이대로 물러설 수 없었다. 우리는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 앉았다. 덤벼라, 핫도그여! 달려오라, 우동이여!
우리는 끝내 그릇을 비워내고 방으로 돌아가서 오메기 떡과 만두와 캔 맥주까지 먹었다. 아직 안심하긴 일렀다. 우리에겐 다음 날의 조식이 남아 있었으니, 과연 이 전투에서 살아남을 자는 누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