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그림 여행 3
전 날 찢어질 듯한 배를 안고 잠들었지만, 아침이 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위장은 전투적으로 조식에 달려들었다. 음식 가짓수가 많지는 않았지만 깔끔하고 부담 없어 4 접시는 먹은 것 같다. 커피도 당연히(!) 두 잔이나 마셨다. 떠날 때 보니 프런트에는 AI 직원 대신 진짜 사람이 서 있었고, 불편한 점은 없었느냐고 친절히 물어보기까지 했다. 새 호텔의 위력이란 대단한 것이었다. 다음에도 새로 문을 여는 호텔에만 가야겠다고 생각했을 정도로.
이 날은 여지없이 흐렸다. 제주도에 맑은 날이 드물다는 건 이번에 제주에 와서야 확실히 느꼈다. 월요일이라 원래 가기로 했던 이중섭 박물관이 문을 닫아 폭포를 보러 가기로 했다. 그중에서도 처음 들어보는 원앙 폭포에 갔는데, 한 쌍의 폭포가 사이좋은 원앙처럼 나란히 흐르는 모습이 참으로 귀여웠다.
바위에 앉아 폭포를 감상하며 멍하니 한참을 앉아 있었다. 얼음장 같은 물에 발을 담그고 고요히 흐르는 물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보니 마음이 평화로워졌다. 물 흐르는 소리에는 어떤 치유의 힘이 있는 것 아닐까? 물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가 풀리고 긴장이 가시는 건 자궁에 있을 때 들었던 소리와 비슷하기 때문일까... 아이든 어른이든 자연스럽게 폭포에 이끌리는 마음은 인간 유전자에 물소리에 대한 좋은 기억이 새겨져 있어서는 아닐까.
그 기세를 몰아 옥빛 물색으로 너무도 유명한 쇠소깍에 갔다. 하지만 날이 흐려서인지 물 색깔이 그다지 예쁘지 않았고, 원앙 폭포의 감동이 너무 셌던 터라 별 감흥이 없었다. 쇠소깍은 바다와 바로 연결되는 신비한 강이다. 강을 따라 걷다 보니 얼마 지나지 않아 바다가 나왔다. 우리는 기념품 가게에서 천혜향 주스를 사 들고 바다가 보이는 벤치에 앉았다.
"야! 이거 우리 와이프 꺼야. 너 우리 와이프한테 다 이른다!"
옆자리에 앉은 아저씨가 다급하게 외쳤다. 무슨 일인가 보니, 웬 멍멍이가 아저씨가 벤치 위에 올려놓은 천혜향 아이스크림을 훔쳐 먹고 있었다. 긴 혀를 아이스크림 컵에 쏙 집어놓고 핥아먹는 기술이 개미핥기 저리 가라였다. 아저씨도 녀석의 뻔뻔함에 졌는지, 말로는 말리면서도 얼굴엔 웃음이 가득했다.
멍멍이가 멀리서 우리의 천혜향 주스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그런데, 마침 공장에서 생산된 천혜향 주스는 올레 시장에서 먹었던 것과 달리 끔찍이 맛이 없었다. 나는 혜자 미소를 지으며 일회용 도시락통에 주스를 넉넉히 부어 주었다.
"우리 멍멍이 목말랐구나, 어서 먹어."
그런데 살짝 맛을 보더니, 고개를 휙 돌리는 게 아닌가. 마치 이 따위 불량 주스는 안 먹는다는 듯이. 목걸이를 한 것으로 보아 떠돌이 개는 아닌 것 같고, 근방에 살며 관광객들에게 온갖 주스와 아이스크림을 얻어먹으며 고급 입맛을 갈고닦은 이 구역 미식견(犬)이 분명했다. 그래, 맛없는 건 너도 아는구나!
녀석은 입맛만 버렸다는 듯 입 주변을 혀로 핥더니 별안간 내 앞에 털썩 누워 잠이 들었다. 마치 내 잠든 모습을 그려봐!라는 듯이.
<백구/00살 - 천혜향 주스 소믈리에 겸 모델>
그림을 다 그리자 기다렸다는 듯 벌떡 일어나 바다를 향해 우수 어린 시선을 던지며 사진 찍기 좋은 포즈도 취해 주었다. 날이 점점 흐려지고 있어서 백구에게 안녕하고 자리를 떴다. 녀석은 역시나 쿨한 표정으로 '훗, 애송이들, 다음엔 진짜 주스를 가져오라고!'라고 말하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다음 목적지는 영화 건축학개론의 촬영지인 카페 '서연의 집'이었다. 고백하지만 이 영화를 한 번도 처음부터 끝까지 본 적이 없다. 영화를 보면서 어찌나 졸리던지... 사실 나는 대부분의 영화를 보다가 잠들기 때문에 내가 끝까지 봤다는 건 그 영화가 정말 재미있거나 내 취향이라는 증거다.
수지가 한가인으로 자라난 뒤 자신을 짝사랑한 엄태웅 앞에 나타나 집을 지어 달라고 한다는 줄거리만 알 뿐, 엄태웅이 공짜로 집을 지어줬는지, 둘은 첫사랑의 회포를 풀었는지... 나머지 이야기는 아직도 모른다. 어떤 영화는 안 봐도 알 거 같고 안 보는 게 더 나은 영화가 있는데 건축한 개론이 딱 그런 영화인 듯하다. 어쨌든 서연의 집은 몰래 숨어 살고 싶을 만큼 아주 멋졌다.
2층 테라스에 앉아 그림을 그리자니 많은 이들이 옆 자리에 앉아 사진을 찍었다. 특히 가족 단위의 여행객들이 많았는데 부모들은 아이들을 어르고 달래가며, 아이를 앉히고 연신 사진을 찍었다. 바로 앞에 아주 멋진 바다가 있는데, 함께 바다를 바라보는 가족은 드물었다. 눈 앞의 자연을 바라보기보다는 자연을 배경으로 예쁜 피사체가 되어야 하는 아이들을 보며 요즘 아이로 사는 것도 꽤나 힘든 일이겠구나 생각했다.
별로 한 일도 없이 피곤하였던 우리는 애초에 사려니 숲길을 가려던 일정을 취소하고 숙소가 있는 함덕 해변으로 향했다. 도로 위의 무법자인 내가 막 운전을 하는데, 친구가 비명을 질렀다.
"여기, 여기, 여기 세워!"
차를 세우고 보니 키 큰 나무가 도로에 죽 줄지어선 모양새가 예사롭지 않았다. 혹시 여기가 사려니 숲이라는 곳인가 싶어 내려서 확인해 보니 정말 사려니 숲길이 시작되는 곳이었다. 러키!
사려니는 제주말로 '신성한, 신령스러운'이라는 뜻이라고 안내문에 친절히 쓰여 있었다. 오즈로 가는 노란 벽돌... 이 아닌 거적이 깔린 길은 끝나지 않을 것처럼 구비구비 이어져 있었다. 시원하게 쭉쭉 뻗은 나무 사이를 천천히 걸으며 깨끗한 공기를 들이마시니 여기가 바로 미세먼지 청정구역인가 싶었다. 그 어떤 지독한 미세먼지라도 이 신성한 나무 숲을 뚫고 들어오진 못 하리라. 나는 숲에 깃든 신성한 힘이 내 영혼에도 스며들기를 바라며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