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은 제주도로 사람은...

제주 그림 여행 4

by MIA


마지막 날 숙소가 있는 함덕 해변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제주도에서 흔히 보이는 제주도만의 풍경이 무얼까 생각해봤다. 말이 뛰어노는 푸른 들판이 그중 하나가 아닐까. 갈색 또는 검은색의 윤기 나는 털로 뒤덮인 날렵한 몸매에 순수한 눈망울을 지닌 말이 넓은 초원을 한가로이 거니는 모습을 보면 참으로 어울리는 곳에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속담에도 말이 나면 제주도로, 사람이 나면 서울로 보내라 했던가. 그런데 이 말도 이젠 옛말이 되어간다.


제주에는 벌써 4번째 국제학교 건물이 지어지고 있다. 국제학교의 학비는 악명이 높지만 아이들을 제주로 내려보내고자 하는 부모들은 이미 줄을 섰다. 바야흐로 사람도 나면 제주도로 보내는 시대다. 유배지였던 제주도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돈을 싸들고 내려오리라고는 선조들은 상상도 못 했겠지. 백 년 후 제주도는 또 어떤 모습일까? 미세먼지에 점령당한 서울을 텅 비고, 돈 있는 사람들은 일찌감치 제주도에 돔을 짓고 살고, 그곳은 오직 영어만 통용되는 세계... 이런 시나리오는 아니겠지.......



<펜으로 간단히 스케치한 함덕 해변>


함덕 해변은 조용하고 한적해서 별로 관광지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마치 개발되기 전의 부산 송정에 와 있는 듯했다. 나중에 보니 관광객들은 전망 좋기로 유명한 카페에 다 모여 있었다. SNS에서 너무나 유명한 그곳에 우리도 잠깐 들러 봤는데, 곳곳에 '화장실에서 샤워를 하거나 옷을 갈아입거나 모래 뭍은 발을 씻지 마시오'라는 경고문이 붙어 있었다. 이런 몰상식한 짓을 하는 사람이 진짜 있을까 싶지만... 얼마나 많으면 경고문을 여러 개나 붙여 놓았을까, 경고문에서 순간 사장님의 괴로움이 진하게 느껴졌다. 너무 인기가 많으면 똥파리도 꼬이는 게 인생의 순리이던가.



<창문으로 바다가 쏟아져 들어올 것만 같은 풍경>


숙소 전망은 최고였다. 창문 가득 바다가 담긴 풍경은 그대로 액자였다. 이런 풍경을 매일 보고 살면 어떤 느낌일까? 무감각해지고 나중에는 지겨워질까? 언젠가 여유로워지면 요즘 유행하는 '제주도 한 달 살기'를 이런 곳에서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 전망을 감상하다 본격적으로 해변 산책을 나섰다.


해변을 따라 걷다 보니 오른쪽 끝에 언덕이 있어 올라가 보았다. 서우봉이라고 여행자들에게는 유명한 둘레길이었다. 그곳에서 그림 같은 말 모녀와 상봉했다. 말 다모녀는 누군가 친 울타리를 안에서 아름다운 자태를 뽐냈고, 행인들은 무엇에 홀린 듯 멈춰 서서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순하고 귀여운 새끼 말은 울타리 너머로 고개를 내밀어 사람들이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도록 해줬다. 그야말로 보고만 있어도 저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풍경이었다.



<그림같은 말 모녀>



그리고 그 일이 일어났다.

새끼 말은 갑자기 엄마에게 가서 잠깐 몸을 비비더니 다시 사람들 쪽으로 왔다. 그러고는 다시 뒤로 홱 돌아 우리에게 엉덩이를 내 보이고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거대한 오줌 줄기를 발사했다. 사람들은 일초 늦게 상황 파악을 하고 뒤로 물러섰다. "허허허, 고놈 참...!"


새끼 말은 우리에게 귀찮으니 이제 그만 꺼지라고 하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자신의 오줌 싸는 자세마저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예쁨을 받고 싶었던 걸까? 말의 마음은 말만이 아니 말을 말자.......


서우봉의 고봉이라 할 만한 곳에 오르니 정자가 있었다. 정자에서 내려다본 바다는 물론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경치를 보고 아름답다는 말 밖에 못 하니 답답하지만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 제주의 바다가 예쁜 건 물론 물 색깔 때문이지만, 곳곳에 핀 노란 유채꽃 덕도 상당한 것 같다. 파란 바다든 초록색 풀이든 노란 유채꽃은 어디든 어울린다.



<서우봉 정자에서 본 함덕 해변>


함덕 해변에는 제주도의 풍경을 이국적으로 만들어 주는 건 야자수가 줄지어 서 있었다. 야자수들은 머리가 모두 깎여 더벅머리처럼 삐죽삐죽했다. 머리가 긴 아이들은 오랜 시간 바람에 시달린 탓인지 모두 한쪽으로 누운 형태였다. 나는 '풀이 눕는다'는 김수영 시인의 시가 생각났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풀처럼 유연하게 눕지도 못 하는 꼿꼿한 야자나무, 머리가 한쪽으로 기울어질 정도면 바람에게 얼마나 얻어맞은 것일까. 야자수의 터프한 삶을 응원하고 싶어 졌다. 굳세어라, 야자수여!


<더벅머리 사총사>



함덕에서 오메기떡 이후로 나의 운명 같은 사랑을 만났으니 이름도 이상한 몸국이다. 사실 이름만 들었을 때는 그게 뭐이여? 했고 실물을 봤을 때도 맛이 의심스러웠다. 그런데 막상 몸국을 한 입 떠먹으니 눈이 번쩍 뜨였다.



<돼지고기와 모자반의 환상적 콜라보>


<신선한 충격의 몸국>


몸국은 돼지고기를 삶은 국물에 해초인 모자반과 돼지고기를 넣어 끓인 국이다. 겉보기엔 그냥 육개장 같지만 한입 떠먹어보면 육개장보다 훨씬 부드럽고, 걸쭉한 국물에 부드러운 돼지고기가 씹히니 그 맛이 기가 막히다. 생전 처음 느끼는 맛이라 비교할 음식도 없다. 왜 제주도에는 생전 처음 먹어보는 맛의 음식이 많을까? 그 많은 맛있는 음식을 반도 못 먹어보고 떠난다고 생각하니 제주도에 또 와야 하는 이유가 분명해졌다.


3박 4일, 짧은 일정 속에서 그림 그리는 여행을 해 보니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시간이 걸리고 인내심이 있어야 하는 일이다. 하지만, 그림으로 기록한 여행을 돌아보니 여행의 순간순간이 생생하게 떠 오른다. 이렇게 조금 색다르고 느린 여행을 계속해 나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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