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 그림 여행
여행의 영감은 늘 뜬금없는 데서 온다. 그 날 나는 프랑스 남부 시골 마을 루르드에 있다는 동굴 샘물의 기적을 다룬 방송을 보고 있었다. 성모 마리아 발현지인 루르드의 이 샘에는 기적의 효험이 있다 하여 연간 500만 명의 순례자와 환자들이 줄지어 찾는다.
침수를 원하는 순례객들은 자원봉사자의 도움을 받아 일인용 욕조만 한 크기의 작은 샘에 몸을 담근다. 샘에 몸을 담근 사람들은 하나같이 아픈 부위가 뜨거워지는 경험을 했다고 한다. 이 기적의 샘에 몸을 담근 후 병이 나았다는 사례는 약 7천 건에 이른다고 한다.
루르드 샘물의 성분을 분석한 과학자들은 샘물에 엄청난 양의 게르마늄이 함유된 걸 밝혀냈다. 게르마늄은 신비의 원소라 불릴 만큼 치유 효과가 뛰어나다고 한다. 게르마늄의 효능에는 항암 작용, 면역력 증강, 체내 산소 공급, 통증 제거 등등이 있는데 게르마늄만 있으면 세상의 불치병은 모조리 치유될 것만 같다.
루르드 샘 못지않게 게르마늄 함량이 높은 온천이 우리나라 전북 고창에 있다는 거다! 고창에 그런 어마어마한 온천이 있는데 안 가 볼 수가 없다. 그리하여 며칠 후 가벼운 수술을 앞둔 환자 지인과 어깨가 늘 무거운 내가 기적의 샘 온천을 찾아 고창으로 향하는 순례길 여행길에 올랐다.
소문의 게르마늄 온천은 고창의 '석정휴 스파'이다. 입장료 만원의 다소 비싼 목욕탕이지만 무려 게르마늄 온천이니까 이해한다. 더구나 프랑스행 비행기 값을 아꼈으니 개이득(?)
온천 내부는 일반 사우나 온천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런데 100% 온천수라는 탕에 몸을 담그는 순간 뭔가 다른 게 느껴졌다. 물에 질감이 있다고 해야 하나, 무게감이 느껴지고 특유의 향이 살짝 났다. 대만의 온천에 갔을 때의 느낌과 비슷했다. 뜨거운 온천탕에서 땀을 흘리고 노천탕에 느긋하게 앉아있자니 없던 병도 나을 지경이었다.
개운하게 땀을 흘리고 나오니 게르마늄 효과인지 몸이 가뿐했다. 그 길로 우리는 배를 채우러 한정식 집에 갔다. 손님들은 대부분 중년의 단체나 부부로 손님 중 우리가 가장 젊은 축이었다. 잠깐, 온천 뒤에 한정식이라니... 이거 완전 효도 관광 코스다(;).
이름하여 퓨전 한정식이다. 보쌈과 퓨전 요리로 한 상이 차려지고, 다 먹으면 떡갈비와 찌개를 비롯한 본격 식사(?) 가 나온다. 밥집에서 1부, 2부로 나뉘어 음식이 나오는 경우는 또 첨이라 신선했다.
맛도 훌륭하고 양도 어마어마했다. 셀프 효도관광 거 참 할 만하네!
이대로 돌아가기 아쉬워서 고창에서 유명하다는 청보리밭에 가 보기로 했다. 드라마 '도깨비'의 촬영지로 유명해진 곳이다. 여름에는 청보리를 심고, 가을에는 메밀을 심는다고 한다. 지금은 청보리가 만개한 계절이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청보리밭은 누런 색이었다.
누런 보리밭이 끝도 없이 펼쳐진 풍경은 뭐랄까... 딱 고흐의 그림이었다!
고흐가 즐겨 그린 밀밭 그림 한 가운데 들어와 있는 것만 같았다.
종이와 물감을 꺼내 그 자리에서 보리밭을 그려보았는데 밭을 그리는 건 정말 쉽지 않았다.
고흐의 시골과 농부들에 대한 애정이 얼마나 컸는지는 그가 남긴 그림을 통해 알 수 있다.
남들은 귀족이나 화려하고 예쁜 걸 그려서 인기를 끌 때 너무도 소박한 시골 풍경만 그려 외면당했던 고흐..
하지만 그의 그림을 통해 우리는 지금도 당시의 시골풍경을 이렇게나 생생하게 볼 수 있다.
밭을 이토록 간결하면서도 강렬하게 표현하려면 얼마나 자세히 관찰하고 얼마나 많이 그려봤을까.
보시다시피 초등학생이 그린 것 같은 그림이 되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진짜 초등학생 무리가 갑자기 나타났다. 아이들은 나를 에워싸더니 내 그림에 흥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한 여자 아이가 내 고체 물감 팔레트를 보며 물었다.
아이: 그림 그리려고 일부러 가져온 거예요?
나: 네, 그림 그리려고 가져왔어요.
아이: 아, 그렇구나. 그런데 그건 정말로 예쁜 그림이네요!
아이는 무슨 교과서에 나올만한 대사를 했다. 그 순간 내 팔레트가 바닥에 떨어져 물감이 바닥에 다 쏟아졌다. 그러자 아이들이 고사리 같은 손으로 물감을 하나하나 주워주는 게 아닌가. 아이들의 동심은 대체 왜 이렇게 순수하고 예쁜지.......
밭 표현에 한계를 느끼고 그림은 그만두고 사진만 열심히 찍었다. 보리밭에서는 모두가 사진 작가가 되고 모델이 된다. 그냥 찍어도 막 작품이 나오니까...
집에서 사진을 보며 심혈을 기울여 그렸더니 조금 나아졌다.
그러고 보니 비싼 돈 들여 프랑스에 갈 필요가 없다. 루르드 샘 못지않은 게르마늄 온천도 있고 아를의 풍경만큼 멋진 보리밭도 있고...고창은 정말 너무너무 멋진 곳이다.
그리고 고창하면 동학농민 운동의 발상지로도 유명하다. 그중에서도 동학농민 운동이 최초로 시작되었던 무장읍성에 가 보았다.
성안으로 들어가자 무척 평화로운 광경이 펼쳐졌다. 한 가족이 깨끗하게 정돈된 잔디 위에 돗자리를 펴고 소풍을 즐기고 있었다. 그 옛날 농민들이 피 흘린 덕에 그곳에서 후세들은 걱정 없이 먹고 마시며 휴일의 즐거운 한 때를 보내고 있다.
기적의 온천의 효과는 어땠냐고? 그 날은 몸이 왠지 가뿐하고 개운했지만, 그 느낌은 채 하루도 가지 않았다. 진짜로 어딘가 아픈 사람은 다르게 느꼈을지도... 루르드 샘의 치유력은 게르마늄이 아니라 기적을 믿는 인간의 마음에 있지 않을까? 기적은 기적을 믿는 자에게만 일어난다고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