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나오고 3주차의 소회
책이 나오고 이제 3주차... 그 동안 저는 지면에 서 있고 싶은데 누군가 저를 헬륨풍선에 매단 것 같은...? 계속 둥둥 떠 있는 느낌으로 몇 주를 보냈어요. 덕분에 해야 할 일, 읽어야 하는 글, 써야 하는 글빚은 밀린 채로 시간이 훅 지나가 버렸습니다.
2주차에는 이런 비유를 써서 일기를 남겼어요. 눈덩이를 하나 단단히 뭉쳐다가 굴렸는데, 평지라서 조금 굴러가다 말 줄 알았지만, 알고 보니 비탈길이어서 무서운 속도로 막 굴러가는 느낌... 다시 잡으려고 막 쫓아가도 이젠 잡지도 못할 정도로 커져서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서 발만 동동 구르는 느낌이었습니다. 이게 이렇게 많은 사람들한테 가 닿아도 정말 괜찮은 걸까? 싶었고요. 이 수많은 얼굴도 못 본 사람들의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거 아닌가(...) 나무(종이책)와 서버(전자책)에게 미안해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쓸데없는 생각에 거의 마비된 기분이었어요. 인스타 페북 메일 카톡 전화로 서평과 인사를 전해주시는 분들의 마음에서 영양분을 얻어 연명했습니다. 메시지를 받은 김미소는 좀 다른 세계의 멋진 김미소고 저 자신은 아무것도 아닌 거 같은 괴리감에 좀 시달렸는데... 사실 아직도 그렇습니다. 근데 뭐 쟤도 얘도 다 저 아니겠습니까? 더불어 살아야죠 뭐...
계속 어쩜 이렇게 다들 따뜻하실까? 하고 놀랐어요. 공개적으로 글을 내놓은 만큼 악플에도 대비해야지! 싶었는데 아무런 악플을 발견하지 못했고, 오히려 너무 넘치는 마음을 받아서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어쩌면 좋을 지 모르겠어요. 세상이 되게 환멸날 때도 있는데, 동시에, 언어와 정체성과 공부 이야기를 이렇게 따스하게 읽어내고, 마음에 드는 문장을 발굴해 내어 귀하게 간직해주는 분들이 있고, 또 힘이 되었음 좋겠다며 다른 분들께 이야기 모음을 선물해주시는 분들을 보고, 세상이 봄볕마냥 따사롭구나... 뉴스만 틀면 세상 만사가 환멸나는데, 그래도 이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는 이유는 뉴스에 나오지 않는 매일의 선한 평범함이 있기 때문이구나, 하고 새삼 또 느꼈습니다.
저는 슬픈 이야기를 쓰지 않았다고 생각하는데, 벌써 여러 분들이 눈물이 주룩주룩 났다며... 처음 한두 분이 그렇게 얘기해주셨을 때는 이 분들이 공감의 천재라서 그런거 아닐까? 했는데, 다른 분들께서도 그렇게 얘기해 주셨고... 심지어 저라는 사람을 일절 몰랐고 책을 통해 처음 접한 분도 그리 말씀하시더라고요. 쓰는 사람도 울면서 쓰지 않았던 이야기였는데 왜...? 왜.....?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저도 이슬아 작가님 최은영 작가님 글 보면 울어요. 특히 이슬아 작가님 글은 행복한 글이라도 저는 막 울고 싶어지더라고요. 아 비슷한 감정인가? 하고... 이 감정에 무슨 이름을 붙여야 할 지 모르겠네요. 이름이 없는 거 아닐까 싶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다른 사람들이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를 해야 될 것 같은 강박이 있었거든요. 저 혼자 막 끄적거리다가 마는 글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과 협업해서 나오는 글이라면 더더욱요. 저는 (영문) 학술글쓰기를 가르치는 사람이기는 하지만 한국어 글쓰기를 따로 배운 적도 훈련받은 적도 없어요. 그런데 박막례 할머님께서 말씀한 이야기가 있죠. "너 하고 싶은 대로 치다 보면 그 박자에 맞추고 싶은 사람들이 와서 춤추는 거여" 라고. 다른 사람들이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를 꼭 하지 않아도, 제가 갖고 온 이야기를 풀어내도, 그래도 되는 거였구나, 싶습니다. 제가 꺼냈던 장단에서 잘된 부분은 더 잘 되게, 못난 부분은 예쁘게 다듬어 주신 출판사 선생님들 덕분에 둥기덕 둥기덕, 계속 쳐 올 수 있었습니다.
2018년 미국에 있을 때 <프로듀스 48>을 봤었는데, 48에 참여하는 연습생을 위해 앞 시즌에서 데뷔한 김세정이 짧게 응원영상을 남긴 게 있어요. 휴대폰 카메라로 급히 찍은 짧은 영상이었는데, 경쟁하려고 하지 말고, 지금 아니면 만나기 어려웠을 친구들과 함께 무대를 꾸리고 배우고 서로 응원하고 도와줬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합니다. 온 국민에게 투표를 받고 매주 순위가 공개되는 프로그램에서 어떻게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좀 어떤 마음인지 알 거 같아요. 순위에 집중하면 순위밖에 남는 게 없고 평가기준을 외부에 맡기는 꼴이 되지만, 순간에 집중하면 그 순간을 온전히 가져갈 수 있고, 내 자신의 마음으로 나를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거 같습니다. 언어 학습도, 그리고 제게는 이번 책을 내는 경험도, 그랬던 거 같아요. 자신의 순간과 경험을 오롯이 가져가는 것.
책을 다시 처음부터 끝까지 쭉 보았는데, 지금 와서야 좀, 했었으면 좋겠다, 싶은 이야기가 있었어요. 저는 Ignorance is bliss, 무지(無知)가 축복이다, 하는 생각으로 살았습니다. 박사를 나갈 때도 아무도 힘들 거라고 얘기해주지 않았고, 일본으로 넘어올 때도 아무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었어요(제 주위분들 왜 그러셨나요). 모르니까 결정할 수 있었고 모르니까 부딪쳐서 깨달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번 글 모음도 몰랐어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도 무지의 축복을 누리며... 여기저기 깨지고 부닥쳐 보겠습니다 ㅠ
책을 마무리하고 있을 때, 좀 조악한 비유지만, 밑천 다 쓴 느낌(...)에 시달렸는데, 그 후에 여기저기 부딪치고 논문도 책도 읽고 수업하고 학생들 만나고 동료 선생님들과 얘기하고 온갖 곳을 들쑤시고 다니다 보니 또 새롭게 차오르는 이야기들이 있더라고요. 뭐 몸뚱아리가 있는 이상 어디에라도 부딪칠 거고, 그러다 보면 이야기거리를 줍고 곱씹고 또 풀어내게 되겠죠. 책의 출간과 동시에 부여된 작가라는 정체성도 앞으로 잘 챙겨 보겠습니다. 제가 잠결에 보거나 수업 직전에 보거나 하여 다 답장 드리지 못한 메시지/댓글이 분명 많을 거라 생각합니다. 이 글을 빌어 죄송합니다..... (_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