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인 조르바를 읽고
반년 전쯤 [술 취한 코끼리 길들이기]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그 책의 핵심 메시지는 '욕망으로부터의 자유'를 추구하라는 것이었다.
[그리스인 조르바]가 하고 싶은 말도 결국 이 '욕망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닌가 싶다. 조르바는 욕망을 억누르지도, 집착하지도 않는다. 욕망을 마음껏 추구하면서도 필요하다면 미련 없이 떨쳐 버린다. 심지어 산투리 연주에 방해가 된다면 자신의 손가락조차 잘라내 버리는 것처럼 말이다.
조르바에게 자유란 모든 내적, 외적 속박에서 벗어나 '지금 이 순간'에 몰입하는 것이다. 그는 매 순간 경이를 느끼며 살아간다. 그래서 누군가는 조르바의 삶이 '카르페 디엠'의 삶이라고 말하더라.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저자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명이다.
그가 조르바를 통해 하고 싶었던 말이 바로 이것이 아니었을까? 사회적 관습이나 관념적 두려움, 욕망에 대한 집착, 그리고 추상적인 이념들로부터 벗어나는 것 말이다.
특히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아래 구절이었다.
"당신은 항상 머리가 앞서니까 바로 그 머리란 놈이 당신을 잡아먹고 말 겁니다."
여기서 머리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을 '안다고 믿는 오만'으로 보았다. 무언가를 안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그 대상에 대한 관심을 잃고 본질을 볼 기회를 잃는다. 당연하고 흔하며 뻔한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반대로 조르바는 모든 것으로부터 새로움을 발견하고 지금 눈앞의 세계에 경이로움을 느낀다. 그가 말하는 자유는 바로 '안다는 오만'에서 벗어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유가 아닐까.
사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기 전부터 욕망과 자유에 대한 사색을 종종 해왔었다. 서두에 언급한 [술 취한 코끼리 길들이기]를 읽으며 '욕망으로부터의 자유'에 대해 알게 되었고, 욕망과 거리를 두거나 욕망이 생기지 않는 환경으로 나를 옮겨야 하는 건 아닐까 고민하기도 했다.
하지만 욕망과 거리를 두며 현대의 삶을 살아내기란 쉽지 않았다. 욕망을 추구하지 않으면 당장 굶어 죽을 것 같았고, 욕망을 추구하지 않기에는 내가 바라는 삶이 있었다. 심지어는 욕망을 외면할수록 스스로를 속이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러던 나에게 그리스인 조르바가 힌트를 주었다. 조르바는 욕망을 긍정하며 이를 삶의 에너지로 전환시킨다. 이를 통해 매 순간 충만감을 느끼고 후회 없는 삶을 살아간다. 어쩌면 욕망을 쫓는 것도, 욕망과 거리를 두는 것도 나에게는 틀린 답이 아니었을까? 진정한 의미의 자유는 내 안의 욕망을 받아들이고, 욕망을 다스리고, 욕망과 함께 노는 게 아닐까? 욕망이 나를 집어삼키게 두는 것이 아니라, 내가 욕망을 품어 안는 게 자유가 아닐까?
조르바는 '지금 이 순간'을 강조하지만, 그에게도 목표가 있고 목표를 추구한다. 조르바는 갈탄 광산 사업의 책임자를 맡았고 헌신적으로 일한다. 이것은 분명히 목표이다. 대신, 그에게 목표란 지금 이 순간에 몰입하기 위한 '수단으로써의 목표'이다. '수단으로써의 목표'는 결과가 중요하지 않기에 조르바는 결과로부터의 자유를 누린다. 성공이든 실패든, 후회나 미련이 없는 것이다.
최근 내가 겪은 불안은 목표를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삼아버린 탓이었다. 목표에 대한 결과에 집착할수록 미래의 불확실성이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두려움이 커지니 무기력해지더라. 결국, 지금 이 순간을 집중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그렇게 헤매던 와중 조르바를 만났다. 조르바 덕분에 내 목표를 수정할 수 있었고 지금 이 순간을 살아내고 있다. 내가 지금 자유롭다고 말하기엔 좀 머쓱하다. 대신 자유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말할 순 있겠다. 나답게 한 걸음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