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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운찬 Oct 10. 2019

호모 사피엔스, 질서를 탐하는 자

질서에 대한 집착


'나는 왜 존재하는가?'


어릴 적에는 하지 않았던 질문을 서른이 넘은 최근에서야 했다. 몇 달 전, 불교 입문서를 비롯해 죽음과 복잡계 관련 도서를 차례로 읽다 보니 삶에 대한 관점이 완전히 바뀌었다. 지금까지 믿었던 질서를 모두 내려놓고 처음부터 다시 관찰하기 시작했다. 삶과 죽음을 의심하고, 진정한 행복은 어디에서 나오는지 깊이 사색했다. 관찰과 사색으로 내가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내가 의식하는 모든 것에는 의미가 없다.' 즉, 내가 속해있는 나라도, 정치도, 이데올로기도, 종교도, 심지어 '나'라는 자아조차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존재이며, 책 [이기적 유전자]에서 언급한 것처럼 '나'라는 존재는 유전자의 복제를 위한 생존 기계,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비슷한 말을 글이나 매체를 통해 접했었지만, 깊게 생각하지 않았었고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갔었다. 하지만 내 안에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시점에 얻은 이 같은 깨달음은 공허하다 못해 공포로 다가왔다. 무서웠다. 마치 내가 와서는 안 되는 길에 들어선 기분이었다. 많은 철학자나 사상가들이 왜 회의론에 빠지고 스님들이 왜 속세를 떠나 출가를 하는지 알게 된 순간이었다. 그와 동시에 회의론과 출가 또한 아무 의미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기존의 질서가 와장창




내가 겪은 그 순간과 깨달음을 타인에게 설명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물론 정답이라고 확신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기존에 믿고 있는 것에 대해 전혀 의심을 품지 않았다. 그것이 스스로 선택한 믿음인지 아니면 부여된 믿음인지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듯했다. 한국이라는 국가에서 태어나 범지구적인 규범과 가치를 따르고 자유와 평등, 인권과 행복을 추구한다. 그리고 그것이 올바른 사람, 정상인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리고 책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 듯하다.


사실은 모두가 틀렸다. 함무라비나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모두 평등이나 위계질서 같은 보편적이고 변치 않는 정의의 원리가 지배하는 현실을 상상했지만, 그런 보편적 원리가 존재하는 장소는 오직 한 곳, 사피엔스의 풍부한 상상력과 그들이 지어내는 서로 들려주는 신화 속뿐이다. 이런 원리들에 객관적 타당성은 없다.
[사피엔스] p163


유발 하라리는 이를 '상상 속의 질서'라 칭했다. 한마디로 '가짜'다. 그렇다면 똑똑한 우리는 왜 이런 가짜 질서를 철석같이 믿고 따르는 걸까? 상상 속의 질서는 신화나 종교, 개혁이나 혁명, 이데올로기 등으로 나타나는데 비록 가짜이긴 하지만 사악한 음모나 무의미한 환상은 아니다. 그저 아주 많은 사람들이 효과적으로 협력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 뿐이다. 우리 사피엔스종은 이런 상상 속의 질서 덕분에 다른 동물들은 이루어내지 못하는 발전과 번영을 이룰 수 있었다.


또한 우리는 질서가 없었던 때로 다시 돌아갈 수 없다. 과거의 방식을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기에는 불확실성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이때로 돌아가고 싶은가?


나는 우리 사피엔스가 '질서를 탐하는 자'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존재 이유가 유전자를 위한 생존 기계라면 유전자는 생존확률을 높이는 쪽으로 우리를 설계했을 가능성이 높다. 행복과 불행을 포함한 모든 감정은 이러한 생존확률을 높이기 위해 고안된 장치이때문에 우리는 위험한 상황은 피하고 안전한 상황을 택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혼자 있을 때 외로움을 느끼고, 여럿이 함께할 때 기쁨을 느끼도록 함으로써 우리는 협력하는 쪽을 택하고 생존확률을 높일 수 있다. 상상 속의 질서는 이러한 협력을 지구 상 어떤 동물보다도 극대화시킬 수 있도록 돕고, 내부적으로는 규범과 가치를 만들어내어 삶에 대한 불확실성을 획기적으로 줄여준다. 만약 누군가가 나를 해하는데 아무런 제약이 없다면 내 생존 가능성은 크게 줄어들 것이다. 하지만 살인에 관한 처벌을 제정하고 이를 강제한다면 내 생존 가능성은 비약적으로 높아질 것이다. 이러한 규범은 '정의'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인식되어 옳고 그름을 정하는 내면의 질서 형성에 영향을 미친다.


과거, 상상 속의 질서는 각 지역과 부족에 따라 그 수가 많고 다양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인류는 정반합1)의 원리로 통합의 길에 들어선다. 유발 하라리는 이러한 통합의 과정을 세 가지 보편적 질서의 등장으로 설명한다.


<유발 하라리가 제시한 세 가지 '보편적 질서'>

1. 화폐 질서 : 국경과 문화를 초월하는 단일 화폐 권역 등장

2. 제국의 질서 : 제국의 이데올로기는 모든 것을 아우르는 경향, 인류를 하나의 대가족으로 인식

3. 종교의 질서 : 유신론, 무신론, 인본주의 등, 초인적 질서(진리)에 의해 설정된 규범과 가치


이러한 통합의 과정은 현재에도 진행 중이다. 전 세계는 계속해서 연결되고, 시간적 거리 또한 획기적으로 줄고 있다. 이는 곧 세상이 더 복잡해지고 있음을 뜻하는데, 이를 컨트롤할 수 있는 더 강력한 질서가 필요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근현대의 역사는 그러한 질서들의 각축장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승리한 자유 시장주의 질서 안에서 개인의 자유와 소비를 중시하는 가치가 옳다고 믿는다.


우리는 승리한 질서 안에서 삶을 누리고 있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이 '상상 속의 질서'임을 알게 된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질서를 거부해야 할까?


나는 나만의 '질서'를 만들기로 했다. 사회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질서에 나를 맡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그들을 품는 것이다. 나는 이를 위해 다음 세 가지 관점으로 세상을 보기 시작했다.

첫 번째, 보이는 것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는 것이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느끼는 연습을 시작했다.

두 번째, 감정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는 것이다. 불행을 소중히 다루고 행복은 보내주는 연습을 시작했다.

세 번째, 옳고 그름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는 것이다. 세상에 옳고 그름은 없으며 모든 것이 자연스러운 것임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생물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사실 부자연스러운 것이란 없다. 가능한 것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처음부터 자연스러운 것이다. 정말로 부자연스러운 행동, 자연법칙에 위배되는 행동은 아예 존재 자체가 불가능하므로 금지할 필요가 없다.
[사피엔스] p216   


나는 이러한 자연스러움을 생물학적 관점 그 이상에서 바라본다. 우리가 성공을 하든, 실패를 하든, 상처를 주든, 상처를 받든, 행복하든, 불행하든 그 어떤 것에도 부자연스러운 것, 즉 문제는 없다. 문제란 내 안에 심어져 있는 '질서'에 대한 '집착'에 의해 생겨나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 집착을 내려놓는다면 '상상 속의 질서'가 아닌 '진짜 질서'를 품을 수 있지 않을까?

진짜를 품은 자는 고통이 없다










1) 정반합 _ 하나의 주장인 정(正)에 모순되는 다른 주장인 반(反)이, 더 높은 종합적인 주장인 합(合)에 통합되는 과정을 이른다.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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