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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사이 Jun 07. 2016

《수박향기》

사소하지만 선명한 기억의 조각들

《수박향기》 에쿠니 가오리


불가사의한 여름이었다.
사소한 일을 유독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에쿠니 가오리의 여러 책들 중에서 제목이 주는 시원함과 달콤함에 이끌려 집어든 책이었건만

실제로는 시원하기보다는 서늘한 어린 시절의 기억에 관한 11편의 단편집이다.


숙모의 집에서 도망치다 만난 조그만 집에서 샴쌍둥이와 개미가 붙은 수박을 나눠먹은 이야기 <수박 향기>,

하숙생 후키코 씨와 복수의 구덩이를 팠던 이야기 <후키코 씨>,

비 오는 날 달팽이를 밟아 뭉개고 나서 공포감을 느끼게 되는 <물의 고리>,

잠시 살았던 바닷가 마을의 빵공장 아줌마와의 만남 <바닷가 마을>,

무더운 여름날 가족들 뿐만 아니라 남동생의 장례를 치르게 되는 <남동생>,

신칸센 안에서 만난 낯선 여자와 도망을 꿈꿨던 이야기 <호랑나비>,  

소각로에서 만난 학생과의 일화 <소각로>,

이혼한 엄마와 옆집 삼촌과의 미묘한 관계를 다룬 <재미빵>,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하던 내가 바닷가에서 만난 또래 아이에게 거짓말로 꾸며내는 <장미 아치>, 어른처럼 동생들을 돌보던 친구 하루카와의 이야기 <하루카>,

 어린시절부터 알고 지낸 미스테리한 친구 M과의 이야기 <그림자>.


저 깊은 곳에 내재된 내 어린 시절의 기억을 다시 떠올려본다.

아멜리 노통브의 책을 읽었을 때 떠올렸던 발칙하고 은밀한 상상과는 다른 잔인하고 음산한 상상을 말이다.

순수하기에 가능했던 어린 시절의 비밀 이야기를 이렇게 긴밀하고 군더더기 없이 담담하게 풀어낼 수 있을까.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부터가 허구이냐는 중요치 않다.

옮긴이의 말처럼 이 책을 통해 너무 멀어서 까마득히 잊힌 것 같지만 몸 속 어딘가 남아 있는 어둠의 심연 너머에 있던 어린 시절의 풍경을 떠올리며 감정의 원형을 들여다 본다.


다 읽고나서 다시 표지를 보니 소녀의 빨간 신발 아래 파랗고 커다란 달팽 모양의 원. 그 안에 소설 속 내용을 암시해주는 달팽이들이 그려져 있었다.


이해된다.

나도 꺼내놓고 싶다.

시답잖고 허술할 지라도..

이것이 에쿠니 가오리 소설의 힘이리라.


책 속 메모


미노루가 수박을 하나 더 집으려고 손을 뻗었을 때, 쟁반을 본 나는 소스라쳤다. 새까만 개미가 수박에 잔뜩 꼬여 있었다. 쟁반에 고인 수박물에도, 그 옆에 놓인 칼에도 개미들이 줄지어 꼬물거렸다. 덧문은 죄다 꼭꼭 닫았는데 어디로 들어왔을까. 그런 생각을 하자 정말로 오싹해졌다. 미노루는 아무렇지 않게 개미가 붙은 수박을 와삭 베어 물었다. 개미들은 물기 많은 빨강 대지 위에서 우왕좌왕했다.


나는 커다란 우산을 어깨에 걸쳐 들고, 파란 장화를 신고 걸었다. 비에 갇힌 느낌을 좋아해서 빗발이 거세면 거셀수록 신이 났다. 발치에 생기는 무수한 물의 고리, 우산을 때리는 빗방울의 감촉, 그리고 바깥 세계와 나를 완전히 가르는 듯한, 경쾌하고 요란한 물소리.


나는 담을 따라 걸으면서 달팽이를 밟고 지나갔다. 장화 밑바닥에서 아작 뭉개지는 가볍고 상쾌한 감촉이 전해져 걸음걸음마다 즐거웠다. 아작, 하는 찰나의 그 허망함. 학교에 가는 길목에서, 나는 그 살육에 열중했다.


나는 음산한 아이였다. 거짓말도 잘했다. 학교를 싫어했다. 다른 아이들이 싫었고, 철제 창틀과 천장의 형광등도 싫었다. 운동장도 발판도 가정 실습실도 교내 방송을 시작할 때와 끝날 때 들리는 지지직하는 소리도.

나는 눈에 잘 띄지 않는 아이였다고 생각한다. 얌전했고, 성적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아이들 속에서 숨을 죽이고 가만히 있으면 그만이었다.


눈을 감으니 한낮의 파란 하늘이 떠올랐다. 동생의 연기. 그런 연기라면 하느님 곁에 곧바로 올라갔을 것이다. 얼마나 요령이 좋은지 모르겠다. 이렇게 화창한 날에, 그렇게 기분 좋게 훨훨 날아 올라가다니. 나빴다. 머쓱해하며 웃는 동생의 얼굴이 보이는 듯했다. 여름에 장례식이 있으면 정말 싫더라. 나 역시 언젠가, 여름에 죽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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