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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사이 Dec 20. 2016

의외의 즐거움, 아리스토텔레스 《시학詩學》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천병희 옮김


과연 내가 이 책을 읽을 수 있을까.

처음 펼쳤을 땐 옮긴이의 서문부터 난관이었다.

최초의 문예비평이라는데 와닿지도 않고 도통 뭔소린지 집중이 되질 않았다.

이해가 안되는 부분은 밑줄을 그어놓고 '?' 표시를 해둔 뒤, 일단 인내심을 발휘해서 읽어보기로 했다.

(시학 본문을 한 번 정독하고 다시 옮긴이 서문을 읽으니 비로소 이해되는 부분들이 생겼다.)


뭔놈의 각주는 그리 많은지..

본문의 이해도를 위해 따라내려간 각주 또한 해석이 필요했다. 읽다가 멈추고 찾아보고 의미를 궁리하다보니 도무지 진도가 나갈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그러다 6장에 들어서니 비로소 윤곽이 잡히기 시작하며 집중력을 발휘해 읽을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온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였다고 할 수는 없지만 알아가는 재미, 찾아보는 재미, 각주에 실린 그리스 신화를 읽는 재미를 느끼고, 플롯의 중요성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시학(詩學)》이란?


그 당시엔 오늘날과 같은 문학이란 개념이 없었기에 시학의 '시'를 지금의 시(詩)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여기서 말하는 '시'는 극적인 드라마나 이야기 또는 무대를 전제로 하는, 희극보다는 비극에 초점이 맞춰진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시학에서 말하는 '시인'이란 극작가 또는 창작자를 뜻한다.


시학의 6장에 희극에 관해서는 뒤에 논하기로 하자 해놓고 마지막 26장까지에도 언급이 없다. 뒷부분을 확인할 남아있는 자료가 없다고 한다. 원래 없었던 걸까, 아니면 누군가의 손에 분실된 것일까..

인터넷을 검색하다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기원 후 3세기 학자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우스에 따르면 아리스토텔레스는 445,270줄의 글을 출간했다고 한다. 하지만 오늘날 남겨진 글은 110,000줄 정도다. 3분의 1의 글이 지난 1800년 동안 사라져버렸다는 것이다.

움베르코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의 배경인 수도원은 아마도 이 세상에 단 한권 남아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2편을 보관하고 있었다. '비극'을 주제로 한 '시학' 1편과는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2편에서 '희극"을 설명한다.

하지만 우주는 조물주가 창조하지 않았던가? 모든 웃음은 비웃음이기도 하다. 신이 창조한 세상을 비웃는다는 것은 신을 비웃는 것과 다르지 않다! 너무나도 위험한 생각을 담은 책이다! 시학 2편의 존재를 숨기려는 도서관장은 결국 책을 읽으려는 수도승들을 살인하기 시작한다.

ㅡ 인터넷 기사 '김대식의 북스토리' 에서 발췌


움베르코 에코의 《장미의 이름. 언제 한 번 읽어봐야지 해놓고 못 읽은 책인데 이렇게 또 《시학》을 통해 만나게 되다니..

웃음과 유머가 허락되지 않는 중세 시대, 희극을 말하는 《시학》 2편의 존재를 숨기다..소설이지만 왠지 신빙성있게 느껴진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을 쓴 목적은?


'당시의 비극 경연(競演)- 디오니소스 제전 때에 벌어지는 비극 경연대회는 신과 영웅들의 드라마를 통해 디오니소스 신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고대 아테네인들은 디오니소스 극장에서 단순히 드라마만을 보고 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여기서 인간의 비극과 운명을 경험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과 관련해서 작시술(作詩術)

에 대한 실용적인 가르침을 주기 위해서'

라지만, 내가 읽어본 바로는 비극의 본질, 비극의 6가지 요소(특히 플롯), 시와 역사의 차이점, 급전과 발견, 작가의 임무 등 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를 들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모방자'란?(제2장)


극작가와 배우들은 행동하는 인간을 모방하는 사람들로 보고, 모방의 대상에 따라 희극 또는 비극이 된다.

희극은 실제 이하의 악인(惡人)을 모방하려 하고

비극은 실제 이상의 선인(善人)을 모방하려 하기 때문이다.

이 말의 뜻은 5장을 읽고나니 이해가 된다.

희극은 악인(惡人)을 우스꽝스럽게 묘사할 때

웃음이 유발되는 것과 관련이 있고,

 비극은 선인(善人)에게서 연민과 공포의 감정을 느끼는 것과 관련이 있다.


*연민과 공포의 감정이란?(제13장)


연민의 감정은 부당하게 불행을 당하는 것을 볼 때 환기되며, 공포의 감정은 우리 자신과 유사한 자가 불행을 당하는 것을 볼 때 환기된다.

선인(善人)이 비극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악덕과 비행을 일삼는 자, 즉 악인(惡人)이 불행을 당할 때는 이런 연민과 공포의 감정을 불러일으키기 힘든 것과 같기 때문이다.


비극의 본질이란?(제6장)


비극의 본질은 드라마(밋밋하지 않은 극적인) 형식을 취하고, 연민과 공포를 환기시키는 사건에 의하여 감정의 카타르시스(katharsis)를 느끼게 해준다는 데 있다.


* 비극의 여섯 가지 구성 요소

ㅡ 플롯, 성격, 조사(언어로 사상을 표현하는 것), 사상, 장경(가면, 분장), 노래


이 중, 아리스토텔레스가 가장 중요시하는 요소는 '성격'이 아닌 '플롯'이다.

(오늘날 등장인물의 성격과 심리묘사에 중점을 두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왈, "비극의 제1원리, 즉 비극의 생명과 영혼은 플롯이고 성격은 제2위이다."라고 했다.


'플롯'이란?


플롯은 스토리 내에서 행해진 것, 즉 사건의 결합을 의미한다. 행동없는 비극은 불가능하겠지만 성격없는 비극은 가능할 것이다.

(성격이 행동으로 드러나야 비로소 극이 된다는 뜻인 거 같다. 비극은 인간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동을 모방하는 것, 인간의 성질은 성격에 의해서도 결정되지만 행ᆞ불행은 행동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하였으므로)


아름다운 색채를 사용했다 하더라도 밑그림이 잘못되면 훌륭한 그림이 될 수 없듯이, 드라마에 있어서도 성격 묘사가 아무리 잘되었다 하더라도 플롯이 잘못 구성되면 훌륭한 작품이 될 수 없다는 뜻이다.(p.53 각주 12)


플롯에 속하는 세 부분, 급전과 발견 그리고 파토스란?(제11장)


급전(반전)이란 사태가 반대 방향으로 변하는 것을 뜻한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에서  사자(使者)가 폴뤼보스왕과 메로페 왕비가 '오이디푸스'의 친부모가 아님을 밝히면서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


발견이란 무지의 상태에서 지의 상태로 이행하는 것을 뜻하는데 등장 인물의 운명에 따라 우호 관계가 되기도 하고 적대 관계가 되기도 하는 것을 말한다.

(에우리피데스의 <이온>에서 '이온'은 자기를 죽이려 하던 여인이 자기 어머니임을 발견하고 화해한다)

이러한 발견은 <오이디푸스>나 <오딧세이아>의 '세족이야기' 에서와 같이 급전을 수반할 때 가장 훌륭하다.



파토스란 무대 위에서의 죽음, 고통, 부상 등과 같이 파괴 또는 고통을 초래하는 행동을 말한다.

( 장인을 불구덩이에 밀어넣는 등 악행을 많이 저지른 '익시온'이 제우스 신의 아내인 헤라를 범하려 하자 제우스 신은 그를 지옥에 가두고 쉬지 않고 빙빙 도는 불타는 수레바퀴에 묶어두었다고 한다. p. 109 각주 5)


급전이나 발견은 플롯을 구성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개연성과 필연성이 있어야 한다. 이는 한 사건이 다른 사건에 단순히 '이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닌, 한 사건이 다른 사건으로 '인하여'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시인(작가)의 임무는?(제9장)


실제로 일어난 일을 이야기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일어날 수 있는 일, 즉 개연성 또는 필연성의 법칙에 따라 가능한 일을 이야기하는 데 있다.

역사가와 시인(작가)의 차이점은 한 사람은 실제로 일어난 일을 이야기하고 다른 사람은 일어날 수 있는 일을 이야기한다는 점에 있다.

 

따라서 연대기 편찬자와는 달리 시인(작가)는 인생을 알고 보편적인 원리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시인(작가)는 우리에게 인간성의 변함없는 여러가지 특징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p. 62 각주 1)



이밖에 비극의 종류(제18장), 비극과 서사시의 차이점, 아리스토텔레스가 높이 평가하는 시인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오딧세이아>도 언급한 장(제24장)도 흥미롭다.

 

11장에서 18장에 이르기까지 각 각주에 담긴 그리스 3대 비극 작가 소포클레스, 아이스퀼로스, 에우리피데스의 신화를 읽는 재미도 꽤 쏠쏠하다.



엊그제 새벽 5시까지 읽고 나니 폭삭 늙은 듯 초췌한 몰골이 됐지만 나름 정리까지 해놓으니 불가능해보이던 일을 해낸 것 같아 보람되다.


* 이 책을 추천해주시고, 책의 이해도를 높여주신 명로진 선생님께 깊은 감사의 말씀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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