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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사이 Dec 23. 2016

세상을 바라보는 따듯한 글쓰기 《천년습작》

ㅡ 김탁환 작가님의 글쓰기 강의를 책으로 만나다

《천년습작》 김탁환

초판1쇄 2009년 5월 13일. 현재는 아쉽게도 품절 상태다


실천을 부르는 책인 《아비 그리울 때 보라 , 세월호 민간잠수사 이야기를 다룬 소설 《거짓말이다 에 이어 세번째로 읽게 된 김탁환 작가님의 천년습작》.


김탁환 작가님의 책은 그 어떤 책도 허투루 읽을 수가 없다.

이 책의 제목에는,

'인간은 누구나 백년학생(百年學生)이므로 글쓰기에 뜻을 둔 이라면 천년습작(千年習作)을 각오해야 한다'

는 의미심장한 뜻이 담겨있다.


글쓰기에 지침이 될 만한 책이자 이야기의 본질, 작가로서의 자세 등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는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시학과 묘하게 중첩된다.


작가란 항상 밑줄 긋는 자이면서
밑줄 긋는 문장을 만들기 위해 몰두하는 족속일 겁니다.(p.17)


글을 쓰기 위해 읽고, 읽는 동안 가슴을 울리는 문장에 밑줄을 긋는다. 그리고 글을 쓰면서 누군가의 가슴을 울릴 문장을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고심한다.


'글을 쓴다는 것은 시간의 부재, 그 매혹에 몸을 맡기는 것이다.' - 블랑쇼


글을 쓰는 동안은 시간을 잊는다. 글쓰기는 그만큼 매혹적이기 때문이다.


발자크의 달력은 자기 시대와 같았던 적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낮이었던 시간은 그에게 밤이었고, 다른 사람들에게 밤이었던 시간이 그에게 낮이었다. 일상적인 세계가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낸 자신만의 세계에 바로 그의 진짜 존재가 있었다.

                            ㅡ 츠바이크, 《발자크 평전》


발자크는 그 완전한 고독에 잠기는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남들 다 자는 밤을 택했다는 말에 깊이 공감한다. 그 무엇에도 방해받지 않는 깊은 밤, 새벽의 시간은 오로지 글에만 집중할 수 있는 유일하고도 정지된 나만의 시간이다.


발자크의 퇴고는 끝이 없었다고 한다. 고치고 고치고 고치고 또 고친다.

발자크처럼 지치지 않는 글 노동자가 되리라.

주제 넘은 다짐을 해본다.

(그가 일할 힘을 얻기 위해 마신 5만 잔의 커피로 인해 심장병으로 결국 목숨을 잃고 말았지만)


의사나 정치인이 되는 것은 하나의 진로 결정이지만, 작가가 되는 것은 다르다.
그것은 선택하는 것이기보다 선택되는 것이다.
글 쓰는 것 말고는 어떤 일도 자기한테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평생 동안 멀고도 험한 길을 걸어갈 각오를 해야 한다.

                    ㅡ 폴 오스터, 《빵굽는 타자기》


교직에 몸 담고 있는 작가도 많다는 말이 나오지만, 내가 천직이라 생각해왔던 교직 생활을 접고 글쓰기에 매달리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정말 글이 나를 부른 것일까.

《불멸의 이순신》, 《나, 황진이》 등 40여편의 굵직한 장편 소설을 써오신 김탁환 작가님도 발자크나 폴 오스터의 경지에는 한참 미치지 못한다고 말씀하시는데 감히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지금은 글 쓰는 것 말고는 어떤 일도 나한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렇기에 평생 동안 글쓰기에 매진할 수 있는 인내심을 길러야 할 것이고, 습작을 게을리해서는 안 될 것이다.


작가는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다 되짚고 고민한 후 창조합니다. 창작의 세계는 그런 것입니다. 무용수에게 몸짓이 그러하듯, 작곡가에게 선율이 그러하듯, 작가에게는 언어가 곧 수단이자 의미입니다. (p.69)


이야기에 관한 이야기


작가(소설가)는 이야기에 왜 그토록 끌리는가.

저자의 말에 의하면 '이야기는 새롭게 만들어지는 모든 것을 포용할 만큼 유연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유연함은 어디서 비롯되었을까요?
이 물음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야기 자체의 역사를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수많은 실패가 이순신을, 에디슨을,
또 누구누구를 성공으로 이끌었듯이,
이야기 역시 다양한 상황 속에서 다양한 깨달음을 몸에 새겼다고나 할까요.(p.110)


어떤 이야기가 매혹적인가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나올 수 있겠지만 그 중, 저자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매력적인 이야기'를 좋은 이야기로 꼽는다.


그렇다면 어떤 주인공이 독자들에게 사랑을 받을까.

저자는 크게 비극적인 주인공과 희극적인 주인공 두 가지로 대별한다. 물론 두 가지 성격을 뒤섞는 경우도 있지만 결국 둘 중 하나로 귀결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먼저, 비극적인 주인공들(세익스피어가 만들어낸 햄릿, 맥베스, 오셀로, 리어왕이나 이순신과 허균 등)은 고뇌가 돋보인다. 그들은 고뇌와 실천을 통해 자신의 삶을 변화시킨다.

희극적인 주인공들(돈키호테나 《남쪽으로 튀어》의 아버지)은 자신에게 주어지는 상황에 두려움없이 부딪히고 설령 패배하더라도 반성하거나 삶의 태도를 바꾸는 법이 없다. 이렇듯 완고하고 멍청하기까지 한 주인공과 세상과의 괴리가 웃음을 불러일으킨다.


"이건 아니다 싶을 때는 철저하게 싸워. 져도 좋으니까 싸워. 남하고 달라도 괜찮아. 고독을 두려워하지 마라. 이해해주는 사람은 반드시 있어." - 오쿠다 히데오 《남쪽으로 튀어!》


저자는 말한다.

비극적인 주인공처럼 고뇌를 드러내지는 않지만, 희극적인 주인공 역시 고독하다고. 다만 그들은 그 고독을 내면으로부터 후벼파지 않고 행동으로 간명하게 드러낼 따름이다. 고독을 견디지 못하면 비극적인 삶과 희극적인 삶도 불가능하다. 철저한 고독은 철저한 불일치와 놀라운 비약을 낳고 돌이킬 수 없는 삶과 죽음을 만든다. 그것들의 가치를 읽어내는 것이 작가의 임무라는 것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나'에 관한 이야기


살아가는 '나'를 소설 속의 '나'로 등장시키기 위해서는 많은 것들이 필요하다. 용기, 노력, 인내, 열정, 투쟁심 등.

'나'를 만천하에 드러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저자는 세상에 벌거벗겨지고서도 당당할 수 있는 내공을 길러야 한다고 말하면서, 프랑스 소설가 '아니 에르노'를 예로 든다.


6월 어느 일요일 정오가 넘었을 무렵, 아버지는 어머니를 죽이려고 했다.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은 내 부모의 직업, 그들의 궁핍한 생활, 노동자였던 그들의 과거, 우리의 존재 양식에서 비롯된 결과물이었다.

이 모든 게 어쩌면 환상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내가 그렇게 느꼈다는 것만은 의심할 수 없다. 회상도 하나의 체험이다.

                         ㅡ 아니 에르노, 《부끄러움》 中


아니 에르노의 책은 부끄러운 순간을 자해나 죽음의 방식이 아닌 '글쓰기'라는 방식으로 응시하고 성찰한다.


그 순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무덤 속까지 영원히 가져가고 싶은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 가장 가까운 이들- 소설 속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믿는- 가족이나 친구, 동료들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고, 또 그들로부터 힐책을 당할 수도 있다.

'왜, 하필,이제와서, 이런 식으로' 그 이야기를 하느냐는 거다.


아니 에르노는 이렇게 말한다.


글쓰기를 행하면서 어떤 위험에 무릅써볼 필요가 있다고 느낍니다. 그 위험이 가지고 있는 특성이 상상적이긴 하지만 나의 글쓰기를 실질적으로 '이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ㅡ 아니 에르노, 《칼 같은 글쓰기》


작가는 왜 이런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글을 쓰는 걸까. 이것은 위로와 평안을 주는 글쓰기가 아니라 오히려 숨어있던 상처들을 하나하나 집어내어 다시 아파하는 행위이다. 독자가 불편한 것보다 열 배 백 배 더 작가는 불편하다. 그것은 어쩌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덤벼드는 한판 '투쟁하는 삶'이기에.

글 따로 삶 따로의 나날이 아니라 글을 통해 삶을 사는 바로 그 일치의 나날인 거라고 저자는 말한다.


때때로 난 삶과 글쓰기라는 두 차원을 동시에 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아요.
                    ㅡ 아니 에르노, 《칼 같은 글쓰기》


저자는 꼭 시나 소설, 수필이나 희곡이 아니더라도 모험을 감행한 모든 글쓰기는 문학성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한다.


자고로 인생에 최고의 보물은 목숨을 건 모험의 여정 그 자체라고 하지 않습니까.
내 감정에 휩싸이지 않고,
내가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했는가를,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바라보는 것이야말로 글쓰기가 도달할 가장 높은 경지 중 하나이겠지요.(p. 154)

내가 누구인지 가장 잘 아는 이도 나지만,
내가 누구란 걸 정확히 나타내기 어려운 이도 역시 나입니다. 거기 1인칭 리얼리스트의 고민이 서려 있습니다. (p. 156)


위험한 모험을 감행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나'를 바라보는, '나'를 찾는 글쓰기. 견고한 '나'를 만들기 위해 더 치열하게 고민하고 용기를 내어 언어로, 문장으로 쏟아내야 한다.


개인의 운명을 역사 속으로 확장시키기


삶은 모순입니다. 15살, 25살, 40살의 나는 각각 다른 존재이지요. 그 삶을 자세히 보면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인생을 격정적으로 돌파하는 사람은 1년 전의 자기 말을 부정합니다. 한 인간의 삶을 그릴 때는 모순되고 비약하는 포인트가 있습니다. 단절의 순간, 그 순간을 짚어낼 수 있어야 합니다. (P.162)


그 단절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그 인물에 관해 폭넓은 자료 조사가 필요한 것이다.


모든 것을 배울 것, 모두 읽을 것, 온갖 것의 정보를 수집할 것.

2세기의 텍스트를 2세기의 눈으로, 2세기의 영혼으로 2세기의 감각들로 읽도록 노력할 것.

    ㅡ 유르스나르, 《하드리아누스의 회상록》


이렇게 자료의 숲을 헤매다가 보면, 점점 그 인물을 이해하게 되고 그 인물의 얼굴과 목소리를 떠올릴 수 있는 것이다. 저자는 그리하여 어느 순간, 내가 이야기하는 것인지 그 인물이 이야기하는 것인지 헷갈리는 접신의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고 한다.



작가는 어이하여 떠돌까 (여행과 글쓰기)


저자는 단 하나의 제목 아래 여행의 모든 것을 담겠다는 불가능한 욕망이 고스란히 담긴 책이자 인생의 책으로 《열하일기》를 꼽는다.


박지원의 《열하일기》나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을 읽는 재미 중 하나는 두 여행기 모두 처음 의도와는 다른 길로 접어든다는 점입니다.
박지원의 애초 목적지는 북경이었고,
혜초도 지금의 인도인 천축국을 둘러보는 정도였겠지요. 그러나 모든 여행이 그렇듯, 길 위에서 뜻하지 않은 일들이 생기고, 그들의 여정은 바뀌고 맙니다. (p.176)


저자의 말처럼 여행과 글쓰기는 닮았다. 한 글자 한 글자가 모여 한 편의 긴 작품을 완성하듯 한 걸음 한 걸음을 디뎌 오랜 여행을 시작하고 마친다.


순간순간 떨리고 순간순간 아득합니다. 반복을 혐오하고 최초를 지나치게 아끼는 예술가일수록 이 막막하고 먹먹한 날들에 이끌리지요.
그날들을 박지원처럼 펼쳐보이느냐 혜초처럼 발바닥에 숨기느냐는 다음 문제입니다.
(p. 177)

'여행은 작가를 매혹시킴과 동시에 그 매혹의 변명이다.' ㅡ 오르한 파묵


따뜻하게 품기


처음에 글은 '읽는' 것이었다. 그러다 점차 저자의 말처럼 감(感)하고 동(動)하면서 글은 '느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작가는 읽고 느끼고 품는 자라고 확신합니다. 한없이 따듯하게! (p.187)


따뜻함을 지니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열린 마음이다. 약점을 찾아내는 읽기가 아닌, 그 책이 지닌 가치를 큰 틀에서 감싸는 이해와 배려가 따라야 한다.


한 줄의 문장을 짓기 위해 작가는 얼마나 오랫동안 고민하고 고민하고 또 고민했을까요. 그 고민의 나날을 가늠해보지 않고, 그냥 단순히 무엇무엇에 맞지 않다며 비판하는 것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듭니다. (p.188)


저자의 말에 공감한다.

나역시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고 글을 쓸 때 아쉬운 점은 얘기하더라도 안좋은 점을 두드러지게 지적하고 싶지 않다.

부족한 부분보다는 그 작품을 통해 배운 부분을 따듯하게 이야기하고 싶다.


따듯하게 읽고 정리하지 못하는 이가 어찌 따듯한 글을 쓸 수 있겠습니까.
힘겨운 하루하루를 버티며 한 단어 한 문장
한 권의 책을 완성한 이에 대한 동류의식에 가까운 따듯함으로 타인의 작품을 품을 필요가 있습니다.(p.189)


이 책에 실린 소설 《원미동 사람들》, 영화 《복수는 나의 것》과 《집으로》 에 대한 서평에서 저자의 따듯한 마음을 느낄 수 있다.


소설을 읽고 독후감을 적듯, 여러분도 영화나 드라마나 뮤지컬이나 연극을 감상한 후에도 꼭 소감을 남기시라 권해드립니다. 작가는 꼭 되새김질을 해야 하는 쌍봉낙타를 닮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p.238)


다행히도 이 부분은 잘 실천하고 있다.

무엇을 읽든 무엇을 보든 글로 써놓아야 마음이 놓이기에.

지금의 되새김질이 반드시 큰 쓸모가 있으리라 믿으면서.


작가는 왜 책을 읽고 또 쓰는 것일까.


나는 밤마다 새벽까지 책을 읽었다. 눈이 아파오고 온몸의 힘이 빠질 때까지, 책을 읽다보면, 때때로 책이 내 얼굴로 뿜어내는 빛이 너무나 강렬하고 현란해서, 나의 영혼과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몸이 녹아 없어지고, 나를 나로 만들어주는 모든 것이 책이 뿜어내는 빛과 함께 없어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그럴 때면, 나는 그 빛이 나를 삼키면서 점점 더 팽창해가는 것을 상상했다.

                        ㅡ 오르한 파묵, 《새로운 인생》


더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매일 틈틈이 책을 읽지만 그냥 잠자리에 들기엔 너무나 아까운 밤의 시간들. 새벽까지 읽고 나면 눈이 뻑뻑하고 온몸이 쑤시더라도 읽는 순간만큼은 지극히 맑은 정신으로 책에 빠져든다. 파묵의 말처럼 책이 뿜어내는 그 빛이 나를 팽창시킨다.


작가는 왜 책을 쓰는 것일까.

저자는 첫 장편역사소설 《불멸》을 출간한 후 저자의 말에 이렇게 적었다고 한다.

'밤을 새워 소설을 읽은 후, 뜨거운 커피 한 잔을 후후 들이키며, 턱밑까지 차오른 감동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는 독자들을 위해, 이 소설을 썼다.

나의 잠을 앗아간 소설들처럼, 내가 쓴 소설이 새벽까지 읽힐 수만 있다면, 어떤 고통이라도 감내하리라.'라고.


누군가 제가 지은 부족한, 만원도 안되는 책을 읽고 자신의 인생을 되새기는 것이야말로 작가가 혼신을 다하여 이야기를 만드는 근거이겠지요. 일찍이 맹자도 《논어》를 읽고 기뻐 춤추지 않으면 논어를 제대로 읽은 것이 아니라 했습니다. (p.252)


 '한 인간의 삶 전체를 되새김질하게 만드는 책, 깨달음을 주는 책, 깨달음으로 인해 새로운 인생을 펼쳐나가는 디딤돌이 되는 책'


그런 책을 만나는 기쁨에, 그런 글을 쓰고 싶은 욕심에 오늘도 나는 읽고 또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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