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을 이렇게나 공들여 읽은 적이 있었던가.
소설 속 주요 배경은 제목에서처럼 1984년이 아닌 새로운 세계, 변경된 세계의 1q84년이다.
1권을 읽기시작하면서 두 주인공의 이야기를 교차하는 방식이나 아내를 폭행하는 남편을 처리하는 방식이 얼마전에 읽은 오쿠다 히데오의 '나오미와 가나코'와 묘하게 중첩되면서 소설 속 다채로운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소설의 중심인물 아오마메와 덴고.
아오마메와 뗄 수 없는 관계인 노부인, 그녀의 충직한 보디가드 다마루,아오마메의 가슴아픈 친구들 오쓰까 다마키, 여경 아유미, 덴고의 회사 편집장 고마쓰, NHK의 수금원이었던 덴고의 아버지, 한 살 때의 어느 한 장면으로만 기억되는 덴고의 어머니, 덴고의 연상 유부녀 야스다 교코, 덴고의 수정 작업으로 베스트셀러가 된 공기번데기의 원작자이자 종교집단 '선구'의 리더를 아버지로 둔 열일곱살 신비로운 소녀 후카에리, 그녀의 후견인 에비노스 선생, 감시자 우시카와, 그리고 두 개의 달이 뜨는 세계의 리틀피플..
1권 제일 처음 인용된 야나체크의 음악 <신포니에타>를 비롯하여 소설 전반에 인용된 여러 소설들.
조지오웰 '1984년'
찰스 디킨스 '올리버 트위스트'
안톤 체호프 '사할린 섬'에 등장하는 길랴크 인..
어느 독일 작가가 쓴 단편 '고양이 마을'
제임스 프레이저 '황금가지'
도스토옙스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카렌 블릭센(이자크 디네센) '아웃 오브 아프리카'
도스토예프스키 '죄와 벌'
세익스피어 '멕베스'
1, 2권까지는 긴장감을 놓지 않고 흥미롭게 읽었는데 3권은 페이지가 가장 많고 제3의 인물 우시카와가 두 주인공과 함께 꽤 많은 비중을 차지함에도 불구하고 거의 다 읽어갈 무렵에는 조금은 싱겁고 허탈한 마음이 든다.
3권은 새로운 국면보다는 1,2권 내용의 가닥들이 합일점을 찾고 우시카와의 치밀한 탐문, 미행, 감시 테크닉에 의해 주요 사건들이 정리가 되는 내용이 많은데 그의 엄청난 활약에도 불구하고 이 인물은 허무하게 끝이난다.
이런 느낌은 우시카와라는 인물에 대한 연민의 감정을 갖고있는 내 주관적인 생각일지도 모른다.
남다른 촉과 명석한 능력을 지녔음에도 비뚤어진 큼직한 머리통과 튀어나온 눈, 짧고 휘어진 두 다리로 묘사되는 기괴한 외양으로 인해 어린시절부터 가족과 학교와 사회에서 외면당하고 고립된 우시카와, 스스로를 유능하고 참을성 있고 무감각한 기계라 칭하며 덴고를 감시하는 데 있어서도 철저히 혼자임을 자처하며 자신의 임무에 집중하다 다마루에 의해 생이 끝나버린다.
약 1500페이지에 달한 두 주인공의 아슬아슬하고 안타까운 각자의 오랜 여정이 끝에 단 몇 십페이지를 통해 해피엔딩으로ㅡ물론 둘의 만남은 필연적이고 바라왔던 바이나ㅡ마무리되는 점도 뭔가 아쉽다.
아직 내겐 의문으로 남아있는 요소들이 너무 많으니까 말이다.
작가는 항간에 나왔던 말처럼 4권을 염두에 둔걸까. 하지만 3권이 출간된지도 벌써 5년이 넘은걸로 알고있는데 아직도 유효한 가능성일까.
3권 끝무렵에 가서 문득 이 작품의 집필 기간이 궁금해져 검색 끝에 3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는 작가의 대답을 발견했다.
작가가 몇 년에 걸쳐 구상한 내용을 단 며칠만에 읽고 궁금증이 다 해결되리라 생각하다니 작가에게 너무 무례한건가 싶기도 하다.
소설 속 주인공에게만큼이나 읽는 내내 제목 속의 question mark처럼 수많은 의문점을 안겨준 소설 《 1q84》
'소설가는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 아니다.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일 뿐이다. '
소설 속에 인용된 체호프의 이 명언이 나같은 독자들의 물음에 대한 작가의 답변이 아닐까?
1권(4~6月)
p 160 자신이 배척당하는 소수가 아니라 배척하는 다수에 속한다는 것으로 다들 안심을 하는 거지. 아, 저쪽에 있는 게 내가 아니어서 다행이야, 하고. 어떤 시대든 어떤 사회든 기본적으로 다 똑같지만 많은 사람들 쪽에 붙어있으면 성가신 일은 별로 생각하지 않아도 돼
p 231 이상이 발생한 건 내가 아니라 이 세계다.
어딘가의 시점에서 내가 알고 있는 세계는 소멸하고, 혹은 퇴장하고, 다른 세계가 거기에 자리바꿈을 한 것이다. 레일 포인트가 전환되는 것처럼. 즉, 지금 이곳에 있는 내 의식은 원래의 세계에 속해 있지만 세계 그 자체는 이미 다른 것으로 변해버렸다..
패럴렐 월드.
그런 일을 하고 나면 그 다음의 일상 풍경이 평소와는 조금 다르게 보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겉모습에 속지 않도록 하세요. 현실은 언제나 단 하나뿐입니다.
p 449 요즘 들어 기묘한 일이 주위에서 연달아 일어난다. 내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세계가 자기 멋대로 나아가고 있다.
p 463 가정에서 아내나 아이들에게 거친 폭력을 휘두르는 건 반드시 약해빠진 인격을 가진 사내들이다. 약하기 때문에 자기보다 약한 사람을 찾아 먹잇감으로 삼지 않고서는 배기지를 못하는 것이다.
p 466 약자의 생피를 빨아마시지 않고서는 살지 못하는 기생충 같은 사내들, 뒤틀릴 대로 뒤틀린 정신을 지녔고 치유 가능성도 없고 갱생의 의지도 없어서 이 세상에 더 이상 살아갈 가치를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자들.
그같은 자들은 어떠한 형태로든 사라지게 하는 수밖에 없다.
p 517 세상의 대다수 사람들이 진실을 믿는 것이 아니라, 진실이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은 아무리 크고 똑똑하게 뜨고있어도 실은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p 544 올바른 역사를 박탈하는 것은 인격의 일부를 빼앗는 것과 똑같은 일이지. 그건 범죄야.
우리의 기억은 개인적인 기억과 집단의 기억이 합쳐져 만들어지는 거야. 그 두 가지 기억은 서로 밀접하게 얽혀 있지. 그리고 역사라는 건 집단의 기억을 말하는 거야. 그것을 빼앗으면, 혹은 고쳐 쓰면 우리는 정당한 인격을 유지할 수 없어.
p 626 티베트의 번뇌의 수레바퀴.
수레바퀴가 회전하면 바퀴 테두리 쪽에 있는 가치나 감정은 오르락내리락한다. 빛나기도 하고 어둠에 잠기기도 하고, 하지만 참된 사랑은 바퀴 축에 붙어서 항상 그 자리 그대로야.
2권(7~9月)
p86 인간에게 죽을 때라는 건 아주 중요한 거야. 어떻게 태어날지는 선택할 수 없지만 어떻게 죽을지는 선택할 수 있어.
p 276 진실이란 대개의 경우, 강한 아픔이 따르는 것이야. 그리고 대부분의 인간은 아픔이 따르는 진실 따윈 원치 않지.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건 자신의 존재를 조금이라도 의미있게 느끼게 해주는 아름답고 기분 좋은 이야기야. 그러니 종교가 성립되는 거지.
p 325 그림자는 우리 인간이 전향적인 존재인 것과 똑같은 만큼 비뚤어진 존재이다. 우리가 선량하고 우수하며 완벽한 인간이 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그림자 쪽에서는 어둡고 비뚤어지고 파괴적으로 되어가려는 의지가 뚜렷해진다. 인간이 스스로의 용량을 뛰어넘어 완전해지고자 할 때, 그림자는 지옥에 내려가 악마가 된다.
ㅡ카를 융 인용
p 597 그곳에서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려는지 예측도 할 수 없다. 하지만 그래도 좋다.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거기에 어떤 것이 기다리고 있건 그는 달이 두 개 있는 이 세계를 살아가고, 자신이 걸어야 할 길을 찾아낼 것이다. 이 온기를 잊지 않는다면, 이 마음을 잃지 않는다면.
3권(10~12月)
p 56 희망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시련이 있다. 단지 희망은 수가 적고 대부분 추상적이지만, 시련은 지긋지긋할 만큼 많고 대부분 구체적이다.
p 112 인간은 희망을 부여받고, 그것을 연료로, 목적으로 삼아 인생을 살아간다. 희망 없이 인간이 계속 살아가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것은 동전 던지기와도 같다. 앞면이 나올지 뒷면이 나올지는 동전이 떨어질 때까지 알지 못한다.
p 152 엄지의 욱신거림이 알려주는구나
불길한 것이 이쪽으로 다가온다
노크를 하거든 그게 누구이든, 좌물쇠여, 열려라
ㅡ'멕베스'의 한 구절 중
p 331 빛이 있는 곳에 그림자가 없어서는 안되고, 그림자가 있는 곳에 빛이 없어서는 안 된다. 빛이 없는 그림자는 없고, 또한 그림자가 없는 빛은 없다.
p 701 몹시 길었어, 아오마메는 말한다.
몹시 길었다, 덴고도 생각한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이십 년이라는 세월이 이미 실체적 질감은 지니지 않은 것이 되어 있다는 걸 그는 깨닫는다. 그것은 오히려 한순간에 지나가버린 세월이고, 그렇기 때문에 한순간에 메울 수 있는 세월이다.
p 729 우리는 1984년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그렇게 간단히 세계가 원래대로 돌아올까.
혹시 이곳은 또 하나의 다른 장소인 게 아닐까. 우리는 하나의 서로 다른 세계에서 또 하나의 다른, 제삼의 세계로 이동했을 뿐인게 아닐까.
p 730 도착한 곳이 예전의 세계이건, 또다른 새로운 세계이건, 두려울 게 무엇인가. 새로운 시련이 그곳에 있다면, 다시 한번 뛰어넘으면 된다. 그뿐이다. 적어도 우리는 더이상 고독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