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이어진 자리

곁에 머무는 이들은 변하겠지만, 우리는 늘 누군가와 함께한다.

by 마음이 동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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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블 위에 놓인 종이 가방들은, 아직 열지 않은 이야기들처럼 조용히 숨을 쉬고 있었다.


각자가 준비한 작은 종이 가방을 테이블 위에 올려둔다. 안에 책이 들어 있다는 건 알지만, 어떤 책인지는 아직 베일에 가려져 있다. 미리 준비한 태블릿으로 사다리타기 번호를 정하고, 각자의 캐릭터는 책의 주인공을 향해 지그재그로 내려간다. 병원 독서모임 송년회의 첫 풍경이다.


서로가 준비해온 책 한 권을 사다리타기로 ‘랜덤’하게 다른 회원에게 선물한다. 본인의 취향일 수도, 낯선 장르일 수도 있지만, 추천하는 이유를 듣고 나면 모두가 고개를 끄덕인다. 식당 안에서 나지막한 박수가 오간다. 우리는 안다. 그 책을 준비하는 시간에는, 결국 ‘상대를 생각하는 마음’이 함께 들어 있었다는 걸.


병원 독서동아리가 생긴 지도 벌써 8년째. 제법 놀라운 일이다. 코로나19가 한창일 때, 사내 식당에는 방역을 위해 투명 아크릴 칸막이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 아크릴에는 독서동아리가 추천하는 네 권의 책이 매달 다른 얼굴로 붙어 있었고, 나는 그렇게 자연스럽게 그 존재를 알게 됐다. 하지만 가림막이 철거되면서 독서 홍보지도 함께 걷혔고, 독서동아리에 대한 소식도 점점 희미해졌다. 새로 입사한 직원들이 이 조용한 모임의 존재를 알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존재감이 옅어졌는데도, 독서모임은 끈적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독서모임 (3).JPG 2018.05. 직장내 첫 독서모임


나는 초창기 멤버다. 당시 어떤 마음으로, 누구의 강력한 주도로 모임이 만들어졌는지는 세월만큼 흐릿해졌지만, 컴퓨터 속 잠자고 있던 사진은 기억을 선명하게 소환한다. 여덟 명이 모였고, 병원에서의 직책을 잠시 내려두고 닉네임을 하나씩 정했다. 미리 읽어온 책에 대해 몇 줄의 감상을 나눴던 것 같다. 첫 번째 도서는 김애란 작가의 『바깥은 여름』. 2018년 5월의 모임이었으니,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던 계절이었다.


서둘러 그때 책을 읽고 표시해두었던 문장을 찾아봤다. 한동안 잠들어 있던 기록은 생각보다 쉽게 손에 잡히지 않았지만, 결국 그때의 내가 밑줄을 그어둔 한 줄을 다시 만났다.


그리고 그렇게 사소하고 시시한 하루가 쌓여 계절이 되고,
계절이 쌓여 인생이 된다는 걸 배웠다.
_김애란《바깥은 여름》(문학동네)


사소하고 시시한 하루. 그 말이 이상하게도 모임의 시작을 설명해주는 것 같았다. 대단한 다짐이나 거창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한 달에 한 번 책을 읽고 몇 줄을 나누던 그 ‘사소한 날들’이 모여 어느새 계절이 되었고, 기어이 8년이라는 시간까지 흘러왔으니 말이다. 그 문장을 읽자 사진 속의 우리도 조금은 다르게 보였다. 아직은 서로 어색한 표정으로, 그래도 같은 페이지를 넘기고 있던 사람들.


그런데 그 문장이 말하는 ‘쌓임’과 달리, 창단 멤버였던 나의 독서모임은 오래가지 못했다.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2년 정도 활동하고 조용히 모임을 나왔던 것 같다. 이유는 여러 가지였을 것이다. 모임 자체에 대한 부담, 내 취향과 맞지 않는 장르에 대한 거부감, 가끔은 책을 추천하고 리딩해야 한다는 무언의 압박, 한 달에 한 번이지만 빠지게 될 때의 미안함. 그런 감정들이 서로 얽혀 있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독서모임은 내 기억에서도, 내 일상에서도 멀어졌다. 물론 ‘독서’만은 끊기지 않았다.




그리고 올해, 바깥의 여름이 끝날 무렵이었다. 사무실 옆자리에 앉은 동갑내기 동료가 “같이 독서모임 들어가자”고 다시 말을 꺼냈다. 예전에도 몇 번 권유를 받았지만 차일피일 미뤄왔고, 이번엔 큰마음을 먹고 참여했다. 9월 첫 모임, 또다시 낯선 사람들과 인사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어제 송년회를 지나고 나니, 우리는 제법 가까운 이야기들을 스스럼없이 나눌 수 있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3초짜리 영상도 손으로 재빨리 넘겨버리는 시대에, ‘독서’라는 활동은 어쩌면 더 힘든 시간을 통과하고 있는지 모른다. 독서의 장점을 길게 열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책을 읽는 일이 좋은 일이라는 건, 대부분 알고 있다. 다만 그것이 ‘모임’이 되는 순간 부담이 생긴다. 그 부담감에 대해서는, 내가 경험으로 충분히 이해한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그때의 감정들마저 시간 속에서 풍화되어 있었다. 같은 책을 읽고도 완전히 다른 감상을 갖는다는 것, 사람마다 좋아하는 장르가 확연히 다르다는 것. 나는 책을 통해 세대 간의 간격을 좁혔고, 누군가의 생각과 일상을 잠시 빌려 경험할 수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예전에 내가 모임을 나왔던 이유들이 지금의 독서모임이 가진 장점이 되어 있었다.


그렇게 플레이리스트는 변하겠지만,
우리에게는 늘 좋아하는 노래가 존재하듯이,
곁에 머무는 이들은 변하겠지만, 우리는 늘 누군가와 함께한다.
_김수현《애쓰지 않고 편안하게》(다산북스)


독서모임 (2).jpg 2025.12. 독서모임 송년회


8년의 시간 동안 책의 장르는 다양하게 바뀌었을 것이다. 누군가는 가입하고, 누군가는 탈퇴하고, 누군가는 퇴사하며 멤버는 자연스럽게 바뀌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모임은 늘 ‘누군가와 함께’ 이어져 왔다. 그래서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은

즐거움의 대상이지,

숙제의 대상은 아닐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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