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칭의 무게

아무렇지 않게 부르던 ‘선생님’이 뜻이 되었을 때

by 마음이 동하다

병원에서 “선생님”이라는 호칭은 공기처럼 자연스럽다. 의사 선생님부터 간호사, 치료사, 방사선사, 간호조무사, 행정 직원까지. (부산이라는) 지역적 특성을 감안하면 대개는 더 다정하게 “쌤~”으로 굳어진다. 김쌤, 이쌤, 최쌤, 동하쌤, 서하쌤. 어느 순간부터 나도 그 호칭을 아무렇지 않게 주고받으며 일하고 있다. 그런데 문득, ‘그 말이 왜 이렇게 흔해졌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선생님은 먼저 선先에 날 생生이 합쳐진 말이잖아요. 먼저 태어나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죠. 제가 좋아하는 작가가 이런 말을 했어요. ‘내가 살아보지 못한 어떤 삶을 먼저 살아가고 있는 사람’은 모두 선생님이 될 수 있다고요.”
_신형철 칼럼 「누구나 누구에게 선생님」(경향신문 2021년 1월 25일)에서 인용
_이슬아《가녀장의 시대》(이야기장수)


얼마 전 책에서 이런 문장을 읽었다.


“선생님은 먼저 선(先)에 날 생(生)이 합쳐진 말이잖아요. 먼저 태어나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죠. ‘내가 살아보지 못한 어떤 삶을 먼저 살아가고 있는 사람’은 모두 선생님이 될 수 있다고요.”


이 문장을 읽는 순간, 병원에서 무심히 불러오던 “선생님”이 갑자기 다른 무게로 다가왔다. 누군가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건 직함을 확인하는 일이 아니라, 내가 아직 살아보지 못한 삶의 시간을 그 사람이 먼저 건너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일이기도 하겠구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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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생각은 자연스레 오래전 한 사람을 떠올리게 했다. 내 초등학교(그땐 명칭이 국민학교였지만 일제의 불순한 의도로 만들어졌다는 명칭임을 알고 난 뒤 초등으로 표기) 6학년 담임 선생님. 그해 새로 부임하신 여자 선생님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반에서 ‘반장’이라는 어마무시한 중책을 맡고도, 성적도 행동도 반장답지 못했다. 반장들은 대부분 ‘수’가 수두룩하고 ‘우’는 가뭄에 우(雨) 내리듯 한두 개쯤 섞이기 마련인데, 나는 ‘우’가 더 많았고 ‘미’도 있었고, 기억이 맞다면 ‘양’도 하나쯤 있었던 것 같다. (정확하진 않지만.)


성적보다 더 큰 문제는 장난이었다. ‘마니또’에게 선물을 준다고 박스를 겹겹이 포장해놓고, 막상 열어보면 풍선껌 하나만 덩그러니 넣어둔 적도 있다. 그때는 그게 얼마나 얄미운 장난인지 몰랐고, 당연히 호되게 혼났다. 또 한 번은 학교 운동장에서 죽은 쥐새끼를 발견하고는(새끼손가락만 한 크기였던 걸로 기억한다.) 여학생 도시락에 넣어버렸다. 점심시간에 그 아이가 기절에 가까운 대성통곡을 했고, 결국 공장에서 근로하시던 어머니까지 학교로 불려오셨다. 지금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릴 만큼 부끄러운 일들인데, 그땐 ‘내가 뭘 그렇게 큰 잘못을 했나’ 하는 철없는 마음이 더 컸다.


그렇게 정신없이 한 해를 보내고 맞이한 졸업식 날, 담임 선생님은 “1년 동안 고생 많았다”며 나를 살포시 안아주셨다. 그 포옹 하나로, 내 어린 시절의 한 장이 조용히 덮이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여전히 장난꾸러기였고, 선생님은 여전히 선생님이었다. 다만 그날의 포옹은, 혼내는 사람과 혼나는 사람의 관계를 넘어 “이 아이가 어쨌든 잘 컸으면” 하는 마음이 전해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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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과 다시 연락이 닿은 건 훨씬 뒤의 일이었다. 내가 첫 아이 돌잔치를 할 무렵(지금 근무하고 있는 병원), 문득 선생님이 너무 보고 싶어졌다. 어떻게 인터넷으로 검색을 했는데, 선생님은 울산의 한 초등학교에서 여전히 교편을 잡고 계셨다. 반가운 마음에 학교 홈페이지에 적힌 메일 주소로 안부 인사를 보냈다. 사실인지 100% 확인할 수는 없지만, 선생님은 나를 기억하고 계셨다. 몇 통의 메일이 오갔고, 그 사이 마음속의 거리도 훅 줄어들었다.


더 놀라운 일은 그 다음이었다. 선생님은 당신의 아들이 휴가를 나와 부산에 내려오는 길에, 내 직장으로 들러 돌잔치 축의금을 전달하게 하셨다. “첫 제자가 성인이 되어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키운다는 게 가슴 벅차고 좋다”는 말을 아들을 통해 대신 전해주셨다. 그날 나는, 내가 ‘선생님’이라는 단어를 배웠던 방식이 사실은 말이 아니라 마음이었다는 걸 처음으로 알았다. 그때의 감동과 감사는 아직도 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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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또 15년이 흘렀다. 내 나이는 어느새 쉰. 내가 초등학교 6학년이던 해에 선생님이 부임하셨다면, 나이 차는 띠동갑 내외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도 울산 어딘가의 초등학교에서 근무하고 계시지 않을까. 정년이 가까운 시점일지도 모르겠다. 울산에서 고등학교 교편을 잡고 계신 지인께 살짝 알아봐 달라고 부탁도 해봤지만, 아직은 감감무소식이다. 조만간 다시 한 번 여쭤봐야겠다.


요즘 나는 병원에서 수없이 “선생님”을 부른다. 그리고 그 호칭이 어느 때보다 조심스러워졌다. ‘내가 살아보지 못한 어떤 삶을 먼저 살아가고 있는 사람’ 그 문장을 떠올리면, 선생님이란 말은 단지 직업이나 직함이 아니라 시간과 마음의 선후를 인정하는 인사처럼 느껴진다. 어쩌면 내가 만나는 환자들도, 보호자들도, 함께 일하는 동료들도, 서로의 삶을 조금씩 먼저 살아본 선생님들일지 모른다. 병원이라는 공간은 그걸 매일 실감하게 한다.


그래서 올해 스승의 날에는 연락만 드리는 대신, 졸업앨범 하나와 마음을 담은 작은 선물을 챙겨 울산으로 깜짝 방문해볼까 한다. 학교 정문 앞에서 “선생님!” 하고 부르면, 그분은 나를 알아보실까. 아마… 못 알아보시겠지? 내가 너무 늙었으니까. ㅋㅋㅋ 그래도 괜찮다. 못 알아보셔도, 그날 나는 한 번 더 제대로 인사하고 싶다.


“선생님, 저 잘 살고 있어요.”


내가 미처 살아보지 못했던 삶을 먼저 살아가며,

그때도 지금도 조용히 내 편이 되어주신 분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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