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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이 동하다 May 19. 2022

독서의 쓸모

점들을 많이 찍으면 그 점들 사이를 잇는 선이 생겨나고 면이 완성된다.

독서가 취미고 글쓰기가 공부라서 즐거운 겁니다. 학교 공부는 지겹지만, 나이 들어 혼자 하는 공부는 부담이 없어요. 시험이 없고 경쟁이 없거든요. 단지 어제보다 하나 더 알고 깨우치고 싶은 내가 있을 뿐이에요.
_김민식《매일 아침 써봤니?》(위즈덤하우스)


    가끔 책을 읽다가 ‘이 책을 읽어서 뭐하지?’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책건문(책에서 건진 문장)을 좋아하는 내가 책에서 건질 문장이 없을 때가 그렇다. 게다가 세계사나 한국사 같은 책을 읽을 때는 더욱 더 그런 생각이 든다. 재미는 있는데, 읽을 땐 똑똑해지는 거 같은데, 책장을 덮고 나면 그 마법이 사라진다. 건진 문장도 없다. 며칠 지나면 기억이 전혀 없다. 분명 재미는 있었는데.



    모처럼 최근 몇 년간 읽은 책 리스트를 살펴봤다. 다행히 읽은 책 제목은 엑셀에 보기 좋게 저장해 놓은 터라 쉽지 않게 검색이 가능하다. 오른손의 마우스를 아래로 드래그 할수록 내 취향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지난 몇 년간 소설은 다섯 손가락에 꼽을 정도고, 대부분이 자기계발 도서다. 물론 에세이 형식도 많지만 그 역시도 자기계발과 관련이 있다. 그런데 눈에 띄는 책들이 몇 권 있다. 세계사 관련한 책이 4권, 한국사 3권, 미술사가 2권 클래식 1권이다. 이거 무슨 조합인가 싶다. 이런 흐름을 보면 그 당시 내 관심사를 알 수 있다. 세계사에서 시작한 궁금증은 클래식으로 귀결되었으며, 4권에서 3,2,1권으로 점점 줄어들었다. 관심이 적어지기보다 책에서 건질 것이 없다는 작은 강박관념에서 일부러 관심을 끊었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확실히 재미는 있었는데.



    책 선택의 기준은 뭘까 궁금해졌다. 흥미, 자기계발, 인문학적 사고, 지식 등 어떠한 선택으로 골라야 잘 골랐다는 것일까. 정답이 없다는 것은 나도 안다. 어떤 저자는 선택의 넓이를 강조하고, 어떤 이는 분야의 깊이를 강조하니, 선택의 기준 또한 지극히 개인의 취향일 것이다. 책 편식의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듯이.


    지난 주 도서관에 가서 5권의 책을 빌렸다. 그 중 신간코너에서 따끈따끈한 새 책 「두선생의 지도로 읽은 세계사」가 포함되어 있다. 딱히 세계사에 대한 알아야 할 이유도, 숙제도, 강요도 없는데 자꾸만 세계사 쪽으로 외도를 하는 내 모습을 발견한다. 세계사에 대해 너무 무식해서 일까? 너무 몰라서 어떻게든 지식을 습득해보려는 이유일까? 아니면 청소년기에 겪었던 창피함에 대한 결핍의 존재일까?


책을 본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결핍이나 열등감이나 절박함이 있다는 것이다.
_이상민《책쓰기의 정석》(라의눈)




    벌써 30년 전 이야기인가? 내가 중학교 시절이다. 몇 학년 때인가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그 당시에도 사회, 국사, 세계사 이런 과목은 내 관심 밖 영역이었다. 수학을 좋아하고 미술을 좋아했던 나였기에 암기과목은 정말 싫었다. 학기 중간고사였던 거 같다. 국사인지 세계사인지 기억이 흐리지만 지금 더듬어보니 세계사로 추측된다. 중간고사 시험은 20문제였고 한 문제당 5점이다. 100점 만점으로 환산한다. 그날 나는 20문제 중에 4문제 맞췄다. 20점이다. 정확히 5분의 1이다.



    대책이 필요했다. 3살 터울 고등학생 형에게 자문을 구했다. 형은 나름 엘리트였다. 중학교 내내 반에서 1등 전교에서도 1등에서 5등을 달렸고, 고등학교에서도 항상 최상위권을 유지하였다. 나랑 같은 환경에서 자랐는데 너무나도 달랐다. 학원도 한 번 안다닌 듯한데, 개천에서 용날 수 있었던 시기라 가능했겠지 싶다. 아무튼 형이 말하는 비법은 교과서라고 말해줬다. 역시 범생이다운 말이다. 그거 말고 빠르게 외워서 점수 올릴 수 있는 방법이 없냐고 닦달했다. 그는 내게 시험 하루 전날 교과서의 굵은 글씨만이라도 달달 외워서 가라고 했다. 머털도사가 누덕도사에게 비법을 알아낸 것 마냥 나는 기말고사에서 부릴 마법의 주문을 외우고 외웠다. 기말고사 하루 전날 세계사 교과서의 굵은 단어를 달달 외웠다. 그리고 다음날 세계사 시험지를 받았다. 당황스럽다. 한때 개그콘서트 유행어처럼 정말 ‘당황스럽다.’ 아는 문제가 없다. 그래도 어떻게 잘 풀리겠지 싶어서 열심히는 풀었다. 열심히. 결과는 20문제 중 2문제 맞췄다. 10점이다. 중간고사보다 더 내려갔고, 아마 처음으로 수우미양가 중에서 ‘가’라는 것을 받아본 거 같다. 가? 가당찮다.


    이 기억은 30년이 지난 지금에도 잊히지 않는다. 세계사에 대한 결핍이 거기에서 오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그렇게 30년이 지나서 세계사에 대한 관심은 「곰브리치 세계사」로부터 출발해서 4권의 책을 연이어 읽은 후에야 약간의 갈증을 해소할 수 있었다. 곰브리치 세계사는 소장가치도 충분하고, 아이들에게도 언젠가 읽히고 싶어서 일반 책이랑 예일대 특별판 모두 구매하였다. 하지만 책을 덮고 나면 잊어버리는 건 여전하다.




서로 전혀 관련이 없는 일들을 각각 독립적으로 도전하면 원하는 일을 찾는데 시간을 단축할 수 있다. 어떻게든 먼저 ‘점’을 찍으라는 것이다. 점들을 많이 찍으면 그 점들 사이를 잇는 선이 생겨나고 면이 완성된다. 아직 점 하나 찍지 못했으면서 거창한 계획을 세우느라 생의 가장 소중한 시간들을 흘려보내지 마라.
_팀페리스《지금 하지 않으면 언제 하겠는가》(토네이도)


    나는 오늘도 출근 후 점하나를 찍었다. 업무 전 습관처럼 책을 펼쳤고, 아직 따끈한 「두선생의 지도로 읽은 세계사」 초반부인 중동지리에 대해 읽었다. 재밌다. 지금 내가 중동지리를 외운다고 변하는 건 전혀 없는데 말이다. 그래도 재미있다. 이 책에서 나는 한 줄의 문장도 건지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미가 있다. 그동안 세계사 책에서는 관심 밖의 영역이었던 중동의 지리적 위치를 알아가는 것도 흥미롭고, 중동에 대해서 이렇게나 몰랐던 내 자신을 알아가는 것도 웃기다. 서로 전혀 관련이 없는 점들이 언젠가 선이 되고 면이 되리라는 믿음으로 점하나를 찍었다.



    우리 모두 평범한 삶을 살고 있다. 브런치에 글을 쓰는 사람도, 글을 읽는 사람도 모두 보통의 삶을 살고 있다. 이 평범함을 비범함으로 바꾸기 위해서 오늘도 우리는 책을 읽고, 자연스레 책을 쓰는 삶으로 연결지어가고 있다. 나도, 당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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