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영향력을 위한 소통
알고 보면
참 바뀌지 않는 세상에 바뀔 생각 없는 사람들과 내가 살고 있다. 모든 것의 본질은 그대로다.
인간은 태초나 고대는 물론이고 지금도 인간(자기 자신)이 중심이기를 바라는 변함없는 삶을 살고 있다. 그리하여 인문학이 대세가 되어 곳곳에서 읽히고 있다. 많은 사람들 중에서 자기 생각을 말할 수 있는, 자기주장이 강한 사람들을 좋아했었다. 곧고 강한 의지를 가지고 올바르게 걸어가는 선한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이 멋있었다.
새로운 만남과 소통
새로운 영역을 공부하면서 그동안 보았던 사람들과는 딴판인 반대 성향의 사람들을 만났다. 자기주장을 다르게 하는 사람들을 만난 것이다. 언어를 표현하는 방법이 다른 사람들 나름의 장점도 있지만 처음에는 밀어붙이는 행동과 자기 위주의 거침없는 표현이 생소했다. 거기에 더하여 누군가 자신을 앞서 성취하거나 교수님께서 특정 학생을 칭찬하거나 지지하면, 거센 반격으로 상대를 누르거나 자신을 치켜세우는 주장을 강의실에서나 휴게실, 종강 파티 등에서 내세웠을 때, 적응하지 못해 말문이 턱 막혔다. 공격당한 선한 교수님이나 학생들을 동조하거나 지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두서없이 즉흥적으로 말하는 그들 모습을 그냥 가만히 지켜보며 관찰하기만 했다.
그들은 행정, 경영, 미술, 의학, 컴퓨터 등 각종 계열 학부 출신이었다. 교육 계열인 나까지 합하여 인간들의 집합체가 만난 것이다. 이미 자기 전공이 있는 인간 집합체가 자기주장을 강하게 섞는 행동은 팀플 인원 배정과 ppt 준비 과정에서부터 발표에까지 신랄하게 표출되었다. 그들이 자신의 민낯을 과감하게 드러내고 억지로 취하려는 결과가 사실은 아무것도 아니고 별 소용없는, 부질없는 것이건만... 모두가 성인이고 대부분 나보다 나이가 많으면서 인생과 일에서 경력자들도 계셨기에 ‘아실 텐데, 잠시 그러는 거겠지.’ 하며 지켜볼 뿐이었다.
한편 내가 그들을 그리 보았듯 그들도 내가 그들과 다른 면이 있다는 걸 서서히 눈치챘다. 그들은 처음에는 나도 그들처럼 무조건 성취하기 위해 쟁취의 가도에 들어선 사람으로 취급했다. 그러다가 핀테크 수업을 함께 듣던 어떤 수강생이 자신의 아이가 아파서 정신없이 오다 보니 발표 자료를 챙겨 오지 못한 적이 있었다. 회사에서 지원받아 다니는 대학원이어서 허점을 남기면 안 된다며 울상이었다. 그 강의는 발표 주제가 모두 동일했기에 내가 발표할 자료 외에 추가 자료가 더 있어서 건네주었다. 이 정도는 도와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나와 달리 그들은 매서운 눈초리로 나를 이상하게 쳐다봤다. 정말 이 정도는 별 일 아니란 걸, 그들에게 불리할 게 없다는 걸 언젠가 알았으면 좋겠지만 몰라도 그만이었다.
그 와중에 나를 빠르게 포착한 어떤 동기는 무엇이 나를 그리 여유롭게 만들었고 이렇게 힘든 공부를 즐기며 할 수 있는지 물었다. 포착만 했을 뿐인데 동족인 줄 알고 반가워서 얘기를 나누다 보니, 내 말을 왜곡하는 또 다른 말과 함께 찢어진 눈매, 불안한 심장박동 소리로 돌아왔다. 뭔지 안다. 젊은 시절의 나도 내 불편한 진실을 인정하지 못하여, 내 몸과 마음, 뇌마저도 잘 조절하지 못했으니까. 동기와 표출 방식은 달랐어도 나도 조급한 나를 인정할 수 없던 때가 있었다. ‘젊은 사람은 젊으니까... 그런데 나와 비슷한 나이이거나 나보다 나이가 더 많은데도 그렇다면... 나이는 참, 상관없는 거구나.’
어쨌든 의미 없는 것에 반응한 꼴이다. 사람들이 표현하는 말도 중요하지만 이런 일들의 반복은 언어를 통한 표현보다는 그들이 행동하는 걸 주시하여 최종 판단을 내리게 했다. 그래서 부연설명이든 뭐든 그들에게 해 줄 말이 없었다. 오해만 계속 반복될 테니까.
100퍼센트 출석률, 필요한 부분의 함축적 필기, 강의 계획안의 핵심 정리, 교수님의 특별 공고, 발표를 위한 자료 모음, 시험 대비를 위한 수업 내용 정리 등 정보는 아낌없이 주며 공유했지만 인간적인 면은 계속 관찰할 뿐이었다. 행동엔 많은 것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기에 행동하는 것만 보아도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말이 말 뿐인 사람이 허다했다. 선한 이의 선한 말을 받아쳐서 뭉개는 현장을 직접 목격한 이후로, 낯선 현장은 그저 관찰부터 하게 되었다. 그들의 말과 행동을 파악하고 필터링하는 작업을 거쳐서 새로 (제대로) 입력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학기가 바뀌어도 여전했다. 강력하고 저돌적인 주장을 여러 번 더 가했다. 떼쓰는 아이가 나쁜 버릇을 내밀어 억지로 하나 더 가지는 격으로 많은 걸 더 가지려 했다. 계속 가지는 상황을 연출하여 원하는 걸 획득했지만, 그들은 가진 것에 만족하지 않고 새로운 것을 찾아서 계속 주장하고 또 주장했다.
철학적, 인간적 위치
그 누가 무엇을 어떻게 주장하든 내가 수용할 수 있는 것이 있고 없는 것이 있다. 이것이 바로 나의 철학적 위치를 의미한다. 이제 나는 나의 인간적 위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세상의 진리와 오류가 끊임없이 반복되듯, ‘언어’를 통한 나의 진리도 이해와 오해를 끊임없이 반복하며 순환한다. 감사하게도 순환하지만 똑같은 circle의 반복은 아니다. 나의 순환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원형이 커졌다 작아졌다 반복하기도 하고, 궤도를 이탈하기도 하고, 그대로일 때도 있다. 그러다 원 위의 한 점에서 구멍이 뚫리어 그 충격으로 생각이 잠시 멈추기도 하고, 어떤 한 점에서 또 다른 원이나 직선과 연결하여 새로운 도형을 형성하면서 갑자기 깨닫기도 한다.
달리 말하면 다람쥐 쳇바퀴를 돌 듯 빙빙 돌다가 몇 바퀴째에서는 이해가 되고, 또 몇 바퀴째에서는 오해가 생기고, 그 오해를 다시 새롭게 이해하고, 다시 또 새로운 오해가 생기는 일련의 과정을 반복하며 순환한다. 이런 과정을 반복하다가 어느 순간에는 크기가 일정하고 안정된 원이 되어 쳇바퀴를 도는 횟수까지도 줄어들 것이다.
‘오해의 의혹’을 ‘이해’로
그 순간을 위해 언어의 오해가 생기면 비트겐슈타인을 찾는 습관이 있다. 오해는 깊은 불안을 야기한다. 그래서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오해를 제거하여 정확히 표현하고 소통하기 위해 『철학적 탐구』부터 펼친다. 누군가는 『철학적 탐구』부터 읽지 말고 『논리-철학 논고』부터 읽으라고 추천했지만, 나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책을 읽고 소화해 내는 건 사람마다 다르다. 휴리스틱(heuristics)도 인정하여 따를 때가 있는 내가 동의할 리 만무하다. 어떤 이는 관련한 책을 전혀 읽지 않고도 모든 걸 이해할 수 있다. 또 어떤 이는 책이 출판된 순서대로 읽으며 이해할 수 있고, 또 다른 이는 자신이 필요한 내용만 읽어도 이해할 수 있다. 나는 방금 말한 세 경우에 모두 해당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주로 『철학적 탐구』만 펼쳐서 해결한다. 이 책이 비트겐슈타인의 전환점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해결되지 않는 경우에는 『철학적 탐구』를 중심으로 비트겐슈타인처럼 사고하기 위해 그의 전후 다른 책들도 펼친다. 그래도, 더 필요한 요소가 있으면 다른 저자의 도서까지 펼치어 ‘오해의 의혹’을 ‘이해’로 만들고자 노력한다.
“의미 있는 것은 말하고, 의미 없는 것은 침묵하라.”
오늘도 비트겐슈타인의 철학, 그의 생각과 주장을 따르기 위해 『철학적 탐구』(이영철, 김면수)를 펼친다.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은 ‘언어 비판’이다. 즉, ‘언어 구조’를 세세하게 잘 살펴보면서 깨닫는 과정이다. 그것이 그의 문제의식이기에 우선 문제가 되는 글부터 읽어본다.
내가 그리움에서, “오, 그가 그저 오기만 해도 좋으련만!” 하고 말한다면, 그 느낌은 그 말에 ‘의미’를 준다. 그러나 그것은 그 개별 낱말들에 그마다의 의미를 주는가?
그러나 여기서 그 느낌은 그 말에 진실을 주고 있는 거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때 당신은 어떻게 여기에서 개념들이 서로 용해되는지를 본다.(이것은 다음과 같은 물음을 상기시킨다: 수학적 명제의 뜻은 무엇인가?)
그러나 우리가 “나는 그가 오기를 희망한다.”라고 말한다면-느낌이 “희망한다.”란 낱말에 그 의미를 주지 않는가?(그리고 “나는 그가 오기를 더 이상 희망하지 않는다.”란 문장은 어떠한가?) 느낌은 “희망한다.”란 낱말에 아마도 특별한 울림을 줄 것이다; 즉 그 울림 속에서 느낌이 표현된다. -느낌이 낱말에 그 의미를 준다면, 여기에서 “의미”는 문제가 되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왜 느낌이 문제가 되는가?
희망은 느낌인가?(특징적 표시.)_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위의 글은 문제를 문제로 제기하는 것이 우리의 ‘언어 논리’에 대한 오해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고대에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서양 철학에서 제기된 문제는 언어 논리를 오해했기 때문에 생겼다. 그렇다면 철학이란 무엇이기에 오해가 생겼을까. 철학(philosophy)은 인간의 삶과 세계에 대한 근본 원리 즉 인간의 본질과 세계관 등을 탐구하는 학문이다. 또한 존재, 지식, 가치, 이성, 인식, 그리고 언어, 논리, 윤리 등 일반적이며 기본적인 대상의 실체를 연구하는 학문이다._wikipedia
비트겐슈타인은 서양 철학자들이 언어 논리를 오해한 상태에서 ‘의미 없는’ 철학적 명제들을 만들어 냈다고 생각했다. 이는 철학적 문제들이 언어 논리에서 벗어난 언어를 사용하여 서다. 그리하여 언어 논리를 올바르게 이해하여 언어의 한계선을 명확하게 그어 줄 필요가 생겼다. 그는 언어 논리에서 벗어난 것들로 의지나 존재, 삶, 죽음, 생성, 종교, 자유 의지 등과 같은 것들을 제시한다. 이것들은 ‘언어의 논리 밖’에 있어서 ‘말할 수 없는 것’이라고 구분한다.
우리는 비논리적인 것은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비논리적으로 생각해야 할 터이기 때문이다._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여기에서 말(언어)의 의미가 시작된다.
‘말할 수 있는 것은 명료하게 말하고,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즉 ‘의미가 있는 것은 말할 수 있는 것이기에 명료하게 말하고, 의미가 없는 것은 말할 수 없는 것이기에 침묵하라.’ 그리하여야 새로운 철학적 문제가 발생하는 것도 방지할 수 있다.
언어의 한계,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은 하나의 활동이었다. 그의 새로운 철학은 사고할 수 있는 것과 사고할 수 없는 것의 한계를 명확하게 설정해 주는 활동이었다. 그는 보통 철학자들이 철학을 하나의 이론이나 체계, 주의(이즘)로 만들려 하기 때문에 언어 논리를 벗어난 언어로 표현하는 오류를 범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철학은 이론이나 주의(이즘)를 만들어 고정불변의 영원한 진리를 찾는 것이 아니라 이론이나 주의를 만들면서 빠지게 되는 언어적 혼란과 오류를 고치고 치료하는 하나의 활동이라고 주장한다.
결국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있는 것을 명확하게 한계 지으면 말할 수 없는 것은 스스로 드러난다고 결론짓는다. 그렇다면 말할 수 없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
비트겐슈타인에게는 엥겔만이라는 친구가 있었다. 어느 날, 엥겔만은 비트겐슈타인에게 독일 시인 울란트가 쓴 ‘에버하르트 백작의 산사나무’라는 시를 보내 준다. 그는 이 시를 읽고 깊은 감명을 받는다. 시의 내용은 십자군 원정을 나간 병사가 산사나무 덤불에서 가지 하나를 꺾는다. 그 병사는 집에 돌아와 자기 집 정원에 그 가지를 심는다. 세월이 흘러 늙은 병사는 크게 자란 산사나무 그늘 아래에 앉아 자신의 젊은 시절을 연상한다. 비트겐슈타인이 이 시를 읽고 깊이 감명받은 이유는 대부분의 시는 표현이 불가능한 것을 표현하려 애쓰는데, 이 시는 그런 노력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표현 불가능한 것은 도덕이다. 변하지 않는 양심을 기본으로 하는 도덕이다. 이 시는 도덕에 관하여 직접 표현하지 않지만 진정한 도덕 자체, 그 모습이다. 도덕이 무엇이라고 꼬집어 말하지 않고 전쟁터에서 가져온 산사나무 가지를 자기 정원에 심는 병사의 행위로써 도덕적 행위를 드러낸 시라고 해석한다.
사람들은 일찍이, 논리 법칙에 어긋나는 것만 제외한다면 신(神)은 모든 것을 창조할 수 있노라고 말했다. -요컨대 우리는 “비논리적” 세계에 관해서는 그 세계가 어떻게 보일지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논리와 모순되는” 어떤 것을 언어에서 묘사할 수 없는 것은 기하학에서 공간 법칙들과 모순되는 도형을 좌표로 묘사할 수 없는 것과, 또는 존재하지 않는 점의 좌표를 제시할 수 없는 것과 꼭 마찬가지이다._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말할 수도 없고 제시할 수도 없는 도덕이나 아름다움은 저절로 드러난다. 가령 도덕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남을 배려해 주는 행동으로 드러나고, 아름다움도 무엇이라고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림을 그리거나 음악을 연주하는 등 예술 활동 자체에서 저절로 그 아름다움이 드러난다.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지 않음으로써 그 본래의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고 말한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에 공감한다. 말할 수 있는 것으로는 자연과학과 논리학과 수학 등이 있고 형이상학적 철학 언어들은 의미가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는 과학보다 윤리나 종교 문제들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단지 지금까지의 철학이 윤리나 종교 문제를 말로 표현하려 한 것이 잘못이라고 하며 철학이 해야 할 일은 그러한 것들을 표현하고 정의하려고 시도할 것이 아니라 언어의 한계를 설정해 주어 말할 수 있는 것만 말하게 하고 말할 수 없는 것은 침묵하게 하는 것이다.
즉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세계의 금을 그어 주는 것이 철학의 임무라 하였다. 그래서 그의 철학이 언어 비판이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했던 동기와 목적은 칸트가 이성, 지식, 경험의 가능성과 함께 설정하려 했던 것과 비슷하다고 한다. 칸트가 우리 이성의 권한과 한계에 대하여 근거를 제시하여 밝히려 한 것처럼 비트겐슈타인은 우리의 언어가 세계를 서술할 수 있는 근거, 즉 언어가 가능할 수 있는 근거를 해명하고 밝히려 했다. 칸트는 그 근거를 인간이 선천적으로 지니고 있는 인식의 틀이라 여겼다면 비트겐슈타인에게 언어가 가능한 근거는 ‘논리적 형식’이었다. 언어와 세계가 공통적 형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형식이 바로 논리적 형식이다.
따라서 비트겐슈타인은 윤리학이나 신앙, 예술의 영역은 말할 수 없는 것으로 구분했다. 윤리적인 행위, 예술의 아름다움, 신이 갖는 인간에 대한 존재 의미와 같은 것들은 말할 수 있는 언어의 영역을 초월하여 존재하기에, 그저 침묵을 통해 보여 줄 수 있다고 주장한다. ‘말할 수 없는 것들에 침묵하라.’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문장의 비밀은 “명확하게 알고 분명하게 말하라.”는 의미다.
언어 속 요소 명제가 결합한 복합 명제들 사이의 진리를 파악하여, 언어가 실제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실적 의미를 잘 그리고 있는지 가려내어 말하라는 의미다.
일상 언어의 관찰, 맥락에 따른 쓰임새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은 일상 언어가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 그 양상들을 관찰하고 기록하여 새로운 관점으로 살펴봄으로써 형성된 것이었다. 그가 관찰한 결과, 일상 언어는 획일적인 법칙이 아닌 무수한 양상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언어는 어떤 대상이나 사실을 그려 주면서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목적을 위해서 사용된다.
누군가가 “나 배고파.”라고 말한다면, 이때 누군가 말한 의미의 전달은 확실하지 않다. 이 말을 듣는 사람은 배고프다고 말한 사람의 의도를 알 수 없다. 이 자체로는 어떤 목적을 담은 말인지 추측할 수 없다. 그냥 ‘배고프구나.’, ‘배고픈 상태구나.’ 그 느낌만 전달된다. 느낌 속에 의미가 있지만, 느낌만 표현하면 의도가 담긴 의미나 목적이 전달되지 않는다. 그로 인해 오해가 생긴다. “나 배고파.”에는 그 당시 말하는 사람의 의도나 목적에 따라서 “빨리 밥 줘.” 또는 “외식하자.”, “배달시키자.” 또는 “내가 빨리 요리해 줄게.”, “배고프지만 먹고 싶진 않아.” 등 여러 가지 목적을 담고 있다. 언어의 목적은 사고를 표현하는 것이다.
문장의 목적도 마찬가지다. “비가 온다.”는 문장은 어떤 사고를 표현한 걸까. 어떻게 생각하고 궁리하여 말한 걸까.
”보고 싶다.” 드라이브 가고 싶다.” 또는 “빨래 걷어야겠다.”, “전 부쳐 먹고 싶은 날씨구나.” 또는 “막걸리 생각난다.” “우울하다.” 또는 “잠 잘 오겠구나.” , “비 맞으러 갈 테야.” 등 다양한 사고가 담긴 표현이다.
다양성은 고정된 것, 딱 잘라서 주어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언어의 새로운 유형들, 새로운 언어놀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들이 생기고 다른 것들은 낡은 것이 되어 잊힌다. “언어놀이”란 낱말은 여기에서, 언어를 말하는 것이 어떤 활동의 일부, 또는 삶의 형태의 일부임을 부각하고자 의도된 것이다. 다음과 같은 예들에서, 그리고 다른 예들에서 언어놀이의 다양성을 똑똑히 보라 :
명령하기, 그리고 명령에 따라 행위하기─
대상을 그 외관에 따라서, 또는 측정한 바에 따라서 기술하기─
기술(소묘)에 따라 대상을 제작하기─
사건을 보고하기─
사건에 관해 추측하기─
가설을 세우고 검사하기─
실험 결과들을 일람표와 도표로 묘사하기─
이야기 짓기; 그리고 읽기─
연극하기─
윤무곡 부르기─
수수께끼 알아맞히기─
응용 계산 문제 풀기─
한 언어를 다른 언어로 번역하기─
부탁하기, 감사하기, 저주하기, 인사하기, 기도하기.
─언어의 도구들과 그것들의 사용 방식의 다양성, 즉 낱말과 문장 종류의 다양성을 논리학자들이 언어 구조에 관해 말해 왔던 것과 비교하는 것은 흥미롭다._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언어는 쓰임이 중요하다. 따라서 말의 의미, 언어 구조를 안다는 것은 일상 언어가 어떻게 쓰이는가를 아는 것이다. 러셀과 프레게는 일상 언어가 불완전하여 완전한 이상적인 언어를 새로 발견하거나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비트겐슈타인은 그렇지 않았다. 일상 언어는 그 자체만으로 질서 정연하고 일상 언어의 애매함이나 모호함도 불완전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정치가들이 연설할 때 사용하는 애매한 말들이나 시인이 시를 쓸 때 사용하는 모호한 언어들은 저마다 그 필요성이 있기 때문에 사용한다고 주장했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 현상에서 하나의 인공적인 언어가 아니라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다양하고 복잡한 일상 언어가 상황마다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 그 방식들을 그저 관찰하고 조사했다. 그리하여 그는 언어의 쓰임새를 게임에 비유해서 표현했다. 『논리-철학 논고』에서 그림에 비유했던 입장을 수정하면서 『철학적 탐구』에서는 언어를 숫자 계산이나 체스와 같은 게임에 비유했다. 게임에는 규칙이 있다. 언어에도 이런 규칙들이 있다고 생각하여 게임에 비유한 것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매우 복잡한 일상용어인 언어를 게임에 비유한 것은 언어가 곧 활동이라는 의미와 같다. 즉 언어의 쓰임은 규칙을 가지고 있는 게임과 같고 그 자체가 역동적인 활동이다.
어떤 물건에 대해 사람들마다 다른 생각을 가질 수 있듯이 어떤 단어에 대해서도 사람들마다 다르게 생각한다.
만약 손잡이가 없는 투명한 컵을 두고서 “이 컵은 깔끔하다.”라고 누군가 말했을 때, 사람들마다 ‘색깔이 없어서, 모양이 단조로워서, 투명하여 속이 보여서, 손잡이가 없어 매끈하여서, 튀어나온 것이 없어서, 재질이 한 가지여서, 자기 취향은 아니지만 봐줄 만하여서’ 등 ‘깔끔하다’는 말에 다양하게 동조하는 반면에 또 어떤 사람은 투명하여 컵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보여서 ‘지저분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이와 같은 단순 명제는 언어의 혼란이 조금만 발생하지만, 만약에 “도덕적 가치와 예술적 행위는 복합적인 관계가 연결되어 있다.”와 같은 명제는 도덕, 예술, 가치 등과 같은 단어들 중에서 어느 한 단어만으로도 ‘이게 뭘까’, 이해하려면 복합적인데다 복잡하기까지 하여 머리가 아프고 혼란스럽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를 사용할 때 혼란에 빠지는 또 다른 이유는 ‘일반성에 대한 갈망’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어떤 사물의 단어 하나를 익히고자 할 때 그 단어의 의미는 무수한 종류를 가진 사물이다. 그리하여 하나의 일반적인 속성만을 머릿속에 그리며 익힐 것이 아니라 개별적인 사례를 주의 깊게 관찰하고 조사하여 눈에 보이는 대로 기술해야 한다고 한다.
우리가 몰이해하는 한 가지의 주요 원천은, 우리가 우리 낱말들의 사용을 일목요연하게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 우리의 문법에는 일목요연성이 결여되어 있다. — 일목요연한 묘사가 이해를 성사시키며, 이해란 다름 아니라 우리가 ‘연관들을 본다’는 데 있다. 그런 까닭에 중간 고리들의 발견과 발명이 중요한 것이다.
일목요연한 묘사라는 개념은 우리에게 근본적인 의미가 있다. 그것은 우리의 묘사 형식을, 우리가 사물들을 보는 방식을 지칭한다.(이것은 하나의 ‘세계관’인가?)_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이 컵은 깔끔하다.”에서 ‘깔끔하다'와 같은 하나의 단어에도 경우의 수가 많이 생긴다. 그러므로 의사소통을 할 때,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은 어떤 맥락에서 그 단어를 사용했는지 확인해야 한다.
“분명한 묘사가 아니라면 그만의 표현 방식을 알아야 한다.”
(2020.7.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