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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mileall Aug 06. 2020

서로 다른 입장의 가치

공평하게 나누려면, 어떤 공정함과 정의 원칙이 필요할까.


  무언가 만족스러울 때 “세상은 참 공평해. 그렇지."라고 내가 말하면, 나의 딸은 "아니에요. 저는 별로 아니라고 생각해요."라고 대답할 때가 있다.


  수학은 모든 조건이 동등하다는 전제하에 시작한다. 동등함으로 출발하여 공평함으로 귀결되는 공부를 한 나는 세상 모든 것이 공평해 보일 때가 있다. 현실과 사회는 그렇지 않더라도 이렇게 생각하기도 한다.

‘공평하지 않은 건 공평하게 나누면 되잖아.'

공평하게 나누려면 공정해야 한다. 공평(equity)은 공정(fairness)과 포용(inclusiveness)의 두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사람들은 공정성에 대해 오랫동안 끊임없이 논쟁을 벌여 왔다. 공정성을 연구하는 학자들도 이 주제는 도덕적인 문제와 논리적인 패러독스가 뒤섞인 카오스와 같은 거였다. 학자들에게조차 혼돈이 생긴 이유는 사람들마다 공정성에 각기 다른 뜻을 적용하기 때문이다. 즉, 공정이라는 단어는 동일하다는 뜻이 아니라 긍정적 차별의 적용이기 때문이다.
 
  속 깊은 나의 딸은 가끔 오빠와 공평하게 대해 달라고 내게 요청했었다. 이해심 많은 나의 아들도 어쩌다 한번 동생과 공평하게 대해 달라고 아빠에게 부탁했었다. 이는 각자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가치를 고려하여 자신들을 공정하게 대해 달라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아들과 딸이 공평하게 대해 달라는 뜻은 자신들 입장에 맞추어 자신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정의의 원칙이 적용된 가치를 각각 다르게 채워 달라는 의미다. 이건 쉬운 일이 아니다. 쉽지 않은 결정적 이유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선택하고 싶은 것을 정직하게 말하기보다 타인을 의식하면서 자신이 갖고 싶은 것을 슬쩍 얻으려 하기 때문이다. 즉, 좋은 사람인 척, 괜찮은 사람인 척하면서 티 안 나게 자기 것을 더 많이 챙기려 하기 때문이다. 무지의 베일이 필요한 순간이다. 이것은 롤스가 공정한 분배(정의로운 사회 제도, 공정으로서의 정의)를 찾는 절차 속 과정에서 나온 개념이다. 무지의 베일 속에서 정의의 원칙들을 선택한다면 타고난 우연이나 사회적 여건으로 인해 유리하지도 불리하지도 않게 보장한다. 모두 유사한 상황에서 비슷한 처지라고 느끼면 자신의 특정 조건에 유리한 원칙들을 구상할 가능성이 줄기 때문이다.


  “솔로몬의 지혜”에서 두 여인은 한 아이를 두고 둘 다 자신이 아이 엄마라고 주장한다. 그러자 솔로몬은 속임수를 사용하여 이 문제를 해결한다. 아이를 둘로 반 잘라서 반씩 똑같이 나누어 주겠다고 한다. 진짜 엄마가 아닌 여인은 아이를 반으로 자르자고 동의한다. 그 순간에 아이에게 매우 낮은 가치를 부여하고 있었다는 본인 내심이 드러난다. 반면, 진짜 엄마는 자신의 주장을 포기하여 자신이 선호하는 가치가 무엇인지를 드러냄으로써 아이 생명을 구한다.
“솔로몬의 지혜”에서 공정한 분배는 단순히 똑같이 나누어 주는 것이 아니라 분배 대상에 대해 '당사자들이 생각하는 가치'를 고려해야 한다는 본질이 담겨 있다.


  최근까지 공정한 분배는 학문이나 이론에만 국한되어 현실에는 거의 적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뉴욕 대학의 스티븐 브람스와 유니언 대학의 수학자 알란 테일러가 시샘 없이 ‘케이크를 자르는 문제’라는 단순한 모델에 접근했다. 이 모델은 단순한 상황이지만 거의 대부분 상황에 적용된다.


  우선 두 사람이서 케이크 하나를 나누어 가지려고 한다면, 이때 가장 공정한 분배 방식은 한 사람이 케이크를 절반으로 자르고 난 후에 다른 한 사람이 자신의 몫을 먼저 선택하여 가지는 것이다. 케이크를 절반으로 자른 사람은 자르는 방식으로 자신이 원하는 가치를 드러낼 수 있고, 먼저 선택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로 자신이 원하는 특별한 가치로 선택한다. 만약에 케이크를 절반으로 자르는 사람이 케이크보다 초콜릿 장식을 더 좋아하여 그것을 가지고 싶다면, 다른 사람이 원하는 가치는 더 큰 케이크 조각을 가지는 거겠지, 예상하여 자신이 가질 조각보다 다른 쪽 조각을 더 크게 자를 가능성이 있다. 이때는 케이크를 자르는 사람이 초콜릿 장식을 가지는 대신에 자신의 케이크를 작게 잘라서 다른 사람이 더 큰 쪽을 가지게 하여 서로 원하는 가치를 획득하는 분배 방식이 적용된다. 행여 자른 케이크 중에 먼저 선택하는 사람도 초콜릿 장식을 좋아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변수만 없다면(케이크를 선택하는 사람의 내심이나 선택 가치를 눈치챘다면) 상대방을 시기하지 않고 공정한 분배를 할 수 있기 때문에 둘 다 승자가 된다. 이러한 선택은 단순한 방식의 전략이지만 해저 자원을 분할하는 국제법이나 두 사람 간의 게임 등에 적용되고 있다.  


  이제 세 사람이 케이크를 나누어 가지려 할 경우를 생각해 보자. 세 사람이 똑같은 몫을 가지려면 두 사람이 나누어 가지던 상황보다 좀 더 복잡해진다.

1992년 <사이언스> 잡지에 나온 이 도전을 브람스는 다음과 같이 해결책을 내놓았다.

첫 번째 사람이 케이크를 세 조각으로 잘라서 나누고 두 번째 사람이 첫 번째 사람이 나눈 조각을 살펴보아 다른 두 개 보다 한쪽이 더 크다고 생각되면 케이크를 다시 다듬어 나눈다. 그리고 세 번째 사람이 케이크 조각을 먼저 선택하여 가진다. 이 또한 세 사람 모두 분배 과정에 참여하고 자신이 생각하기에 가장 좋은 몫을 선택하기에 분쟁의 소지가 없다.


  세 사람이 케이크를 나누는 것이 가능해지자, 브람스는 네 사람에게까지 확장해 보지만 효과를 거두지 못한다. 그래서 유니언 대학의 수학자인 친구 테일러에게 연락한다. 테일러는 공정한 분배(분할)를 연구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새로운 접근을 도전적으로 하리라 예상해서였다. 예상했던 대로 테일러는 분쟁 없이 원하는 것을 분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하지만 일상적인 상황에 적용하기가 어려워서 브람스와 테일러는 활용 가능한 방법을 제시하여 비슷한 결과를 얻게 한다. 그들이 제시한 분배 방법은 하나의 케이크로 나누는 것이 아닌 '조정된 승자(Adjusted Winner)'라는 새로운 제도로 분배하는 방식이었다. 이 제도는 해당하는 각자가 100점을 갖고 이 점수를 자신의 선호도에 따라서 분배하는 방식이다. 이것은 이혼 문제나 국제적 갈등, 각종 수많은 분쟁에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쉬우면서도 융통성이 있어서 수학자 외  많은 사람들도 호응했다.


  이 새로운 제도를 이혼 문제로 설명해 보면 이혼하는 부부 중에 한 배우자가 주택에 관심이 있으면 주택에 90점을 부여하고, 다른 배우자는 생계비나 세금 특혜에 더 관심이 있으면 생계비에 70점을 부여한다. 첫 번째 단계에서는 각자 관심이 있어 가장 많은 점수를 부여한 대상을 각각 가지고, 두 번째 단계에서는 누가 더 점수를 많이 가지고 있는지 계산한다. 현재 주택을 가진 배우자는 90점을, 생계비를 가진 배우자는 70점을 가진 상태다. 이제 두 배우자의 점수 차이를 보정한다. 70점을 가진 배우자는 30점에 해당하는 생명보험을 더 가지고, 90점을 가진 배우자는 10점의 가치가 있는 컴퓨터를 더 가진다.

  만약 점수가 쉽게 나누어지지 않을 때는 분쟁의 소지가 없도록 그들이 만든 수학 공식에 따라서 분배하도록 한다. 그들이 만든 공식은 우선 서로 다른 배우자가 다른 방식으로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물건에 가치를 매긴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가진 물건보다 자신이 가진 물건에 더 높은 가치를 두기 때문에 각자 자신이 50퍼센트 이상을 얻었다고 인식한다. 같은 방식으로 자신이 싫어하는 물건이나 잡일 같은 노동, 피하고 싶은 것(달라지는 서류 갱신을 위해 줄 서는 일이나 집을 정리하며 쓰레기 처리하는 일 등)에는 음의 점수를 부여한다(K.C. 콜, 2013). 이렇게 세세하게 구분하여 대상마다 양이나 음의 점수를 부여하여 서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분배하는 방식이다.

 

  브람스와 테일러의 새로운 분배 제도에 대해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회의적인 사람들도 있었다. 특히 이혼 법률가들은 이러한 합리적 접근이 이혼이라는 감정적인 상황을 다루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겠느냐며 회의적이었다. 하지만 지지하는 사람들 생각은 재산과 생계비를 합리적으로 나눌 수 있고 상처 받은 자존심과 동반자의 상실과 같은 문제를 구분하여 해결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찬사로 반응했다.


  찬사에 휘둘리지 않고 공평하지 않은 현실을 재빠르게 직시한 회의적인 사람들의 입장을 생각해 본다.

  공평하지 않은 건 공평하게 나누면 된다고 이미 언급한 바 있지만 누구나 모두 공평하게 나누어 가질 수 있는 사회는 아니다. 그래도 나누는 것을 생각해 본다. 보통, 사람들은 많은 것을 나눈다. 대화를 나누고 글을 나누고, 고민도 나누고 행복도 나눈다. 그리고 음식을 나누고 사랑을 나누고, 지식도 나누고 세상도 나눈다.

  흔히 나눈다는 말은 분수를 의미한다. 공평하게 나누는 것과 관계있는 개념은 곧 분수다. 합리적 나눔을 의미하는 분수는 평등 논리와도 관계가 있다. 모두에게 정의로운 평등, 공정한 평등이 존재하는 사회라면 사람들이 원하거나 가지고 싶어 하는 걸 어떻게 나누어 주고 채워 줘야 할까.

  다음 그림은 야구 경기장이다. 야구 경기를 관람하는 상황이다.


from 함영기, 2019, p.75


세 아이가 세 가지 상황에 놓여 있다. 우선 가장 오른쪽 그림은 원래 주어진 현실(reality)이다. 현실은 누군가는 비빌 언덕조차 없고, 누군가는 적당히 살 만하고, 누군가는 기반이 차고 넘친다. 이것은 초기 조건의 차이다. 초기 조건인 부모의 사회경제적 수준과 배경에 의해, 어느 정도 적당한 경제력을 가진 부모의 아이는 발판 하나일지라도 깔고서 야구 경기를 관람하고, 부모의 경제력이 월등한 데다 키마저 큰 아이는 오히려 발판을 7개나 깔고 서서 멀리까지 잘 볼 수 있는 위치에서 시원하게 야구 경기를 관람하고 있다. 반면 부모가 경제력이 없거나 재산을 전혀 상속받지 못한, 발판이 전혀 없는 키 작은 아이는 여전히 야구 경기를 관람하지 못하고 있다. 안타깝다.

  기회는 균등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초기 조건을 수정해 보자. 출발점이라도 같게 해 보자. 평등(equality) 개념이 된다. 발판을 모두 똑같이 하나씩 나누어 주면 가장 왼쪽 그림이 된다. 그런데 출발점을 분명 똑같이 제공해 주었지만 현실은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 이런 맙소사, 키 작은 아이는 여전히 야구 경기를 관람하지 못하고 있다.

  내가 바라는 사회는 이런 사회가 아니다. 선택은 각자의 몫일지라도 모든 아이가 야구 경기를 관람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사회다.


  같은 내용이지만 다시 한번 더 생각해 본다.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마이클 샌델은 말한다, 차별 극복만으론 기회 평등을 이룰 수 없다고. 특히 가족 제도 때문에 모든 개인에게 평등한 기회를 줄 계획을 실현하기는 어렵다고 말한다. 부의 대물림뿐 아니라 성실하고 양심적인 부모가 자녀에게 풍부한 관심과 자원, 인맥을 제공하기 때문에 경쟁이 평등할 수 없다고 보았다.


  이 모든 걸 배제하고 모두에게 공평한 기회가 주어진다면 정의로운 사회가 이루어질까?


  올해 정부에서 지급한 코로나 19 긴급재난지원금에서도 지금 주장할 원리가 적용되길 바랐다. 하지만 똑같은 금액을 모두에게 똑같이 나누어 주어 출발점만 같게 해 주었다. 그랬기에 현실적으로 누군가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고, 누군가는 그냥 자신이 살던 그대로였고, 또 누군가는 여전히 차고 넘쳤다. 공정한 국가를 꿈꾸는 정부가 국민을 도와주고 싶은 뜻을 잘 반영했으면 좋았을 텐데, 모두 각자가 살고 있던 그대로였다. 좋은 뜻을 반영하려면 올바르고 곧게 실천해야 한다. 모두에게 각자 지원해 줄 때는 사람들마다 '다른 조건에 처한 상황'을 고려하여 '양과 질'을 다르게 주어야 결과적으로, 가운데 그림처럼 세 아이 모두 환호하며 야구 경기를 관람할 수 있다.

정의로운 평등, 공정한 평등, 바로 공평(equity) 개념이다. 수학이다. 인간을 위한 사회 정의와 함께하는 수학이다.




  가운데 그림을 보며, ‘이제 공평한 사회가 되었구나.’ 흐뭇해하며 마무리하려는 순간, 아들이 내 옆을 지나간다.

  “이거, 유명한 사진이네요."

  아들 말을 얼른 받아서 물어본다. 분명 아들은 또 다른 해석을 알려 줄 테니까.

  “어떻게 유명한 걸로 알고 있니?"

  “공산주의, 자본주의, 이상주의 사진으로요."

  “으음? ..., 평등은 공산주의? 현실은 자본주의? 공평은 이상주의란 거지?"

  “네, 맞아요."

  흐흣, 웃으며 아들을 보내준다.


  세 그림의 모습은 모두 현존한다. 퍼센트만 다르게 분포되어 있을 뿐이다. 기성세대는 공평(equity)함을 누리지 못하고 살았기에 가운데 그림이 현실적이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현세대는 가운데 그림처럼 이미 누리고 있고 더 많이 누리기 위해 공평(equity)한 이상주의를 요구하고 실천도 하고 있다.


  ‘으흐, 나는 이상주의자이기도 하지.’

그래서 나에겐 공평함이 당연한 것이었구나. 자연스럽게 저절로 공평함을 추구했구나. 인간은 현실에 처한 상황을 감당하며 미래에는 더 나은 이상을 실현하길 바라며 산다. 어떤 순간이든 공평하게 대하고, 공평하게 나누어 주어 공정하다고 느끼는 사람들 퍼센트가 더 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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