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mileall Oct 15. 2022

엄마는 아들을 잘 모른다

대학로 연극

아들과 나는 코드가 맞다. 아들이 나를, 내가 아들을 우린 서로 존중하는, 불편하지 않은 대화를 하는 편이다.


어느 날,

아들이 전화로 도움을 구했다.

용돈 소비 성향을 알고 있었는데, 그날은 왜 용납하지 못했을까.

내 컨디션 탓이었겠지.

아들은 부드러운 어투로 미안한 마음을 담아 의논을 구했건만.

난 운동에 이은 스케줄이 버거운 날이었다.

감정 조절을 잘하는 편인 아들은 엄마의 짜증과 무심함을 끝까지 받아 주었다.


전화를 끊은 후,

세상에, 어머나, 화가 잘 나지 않는 내가 피곤하면 짜증 정도에서 그치지 않는 것에 놀랐다.

‘뭐에 그리 연연하니. 그냥 깊은 의미나 지나친 관심을 버리자. 다 스스로 알아서 잘할 거야. 내가 꼭 해결사일 필요는 없잖아.’

과정에 따른 결과의 빛을 누린 삶의 습관은 적극성과 긍정이 항상 따라붙는다.


아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상황이나 처지도 아랑곳하지 않은 나를 뒤돌아보며 안타깝고 아쉬운 이 정체모를 기운을 해소하고 싶었다.


지인과의 담소로 잊어버려야지.

우선 잊어버리자. 내 실수를.

카페 리즈 야외 테이블에 앉아 햇살을 가득 받으며 수다에 빠져 있을 때, 톡이 울렸다.

연극을 보러 가자는 톡이었다.

‘으음? 오늘이잖아.’



“당신은 아들을 모른다.”라는 연극 제목이 “엄마는 아들을 모른다.”라는 제목으로 읽혔다. 급박하구나.(미안하구나.)

난 아들의 지금을 잘 모르는구나. 알고 싶다는 열망에 지인과의 수다를 중단하고 일어났다.


어제의 실수를 만회할 기회다.


대학로를 향해 가는 지하철은 퇴근 인파로 붐비었다. 웬일인지 사람들 몸이 부딪히고 하루에 절은 사람들 체취가 물씬 나도 아무렇지 않았다.

희망이란 단어가 붙어 있어서일까.

아들을 이해할 가능성을 부여해 줄 연극을 보러 가는 길이 설레었다.

송은 대표가 고마웠다. 적시에 나를 호출해 주다니.

혜화역도 참 오랜만이다. 세월은, 시간은 나를 어디에 두고 아들마저도 어디에 띄운 채 살고 있었던가.


버섯 샤브샤브를 풍성하게 먹고 대학로 예술극장 의자에 앉았다.

연극이 시작되자 심장이 ‘쿵, 스르르, 후우’를 반복했다.

아들의 현실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고, 모든 엄마가 콩깍지 쓰고 아들을 보고 있는 장면에 ‘스르르’ 마음이 녹았다. 엄마가 아들의 참모습을 발견하는 결말에는 ‘후우’했다.


나를 위한 연극을 본 건 오랜만이구나.


아들에게 필요한 요소를 공감하고 살살 긁어줘야겠구나.


아들이 진정 좋아하는 전공을 위해 여러 해 둘러 둘러 기어이 다가간 성취감에만 젖어 있었구나. 그저 안도하고 있었구나.


청춘은 휘몰아치는 감정의 소용돌이로,

미래의 불확실성으로,

지적 갈망으로

흔들리는 영혼인 것을.


“아들아, 엄마가 널 잘 몰라도 엄마 마음은 언제나 변함없어.”


(2022.9.27)

작가의 이전글 대화의 그림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