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퇴근 후 컨디션이 좋지 않아 침대에 누워 저녁시간을 보내다가 문득 임상년차를 생각해본다. 한의대를 졸업하고, 4년간 전공의 시절을 보냈다. 레지던트 시절은 힘들었지만, 내가 환자와의 만남을 무척이나 좋아한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하는 꼭 필요한 시간이었다. 병원에서 나오자마자 동네에 작은 한의원을 개원했다. 남들보다 다소 이른 나이에 개원하면서 수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매일 우는 게 일이었던 것 같다), 정말 감사하게도 4년차 개원원장이 되어 오늘도 무사히 진료를 마쳤다. 내가 크게 아프지 않고, 직원들 누구도 다치지 않았고, 한의원에 화재도 수해도 없었고, 강도도 도둑도 들지 않았다. 당연해 보이는 것들이지만 이 감사함은 정말 어떻게도 표현이 안된다.
진료일기를 써 보기로 했다. 글 쓰는 걸 좋아하다 보니 폰에 가끔 끄적일 때는 있지만, 꼼꼼함과 관련된 그 어떤 유전자도 지니고 태어나지 못해 내 글은 항상 어딘가에 적히고 어딘가에서 사라진다. 개원을 하고 0세부터 100세까지 매일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마어마한 일인지 개원을 하고 알았다. 한 사람을 만나는 것은 한 세계를 만나는 거라 들었다. 매일 수십명의 세계를 만나고, 한의원에는 수천개의 세계가 차곡하게 쌓여있다. 고령인구가 많은 동네의 한의원이라 어르신들이 주로 많이 찾아주시는데, 그 세월이 겹겹이 쌓인 문장들 중에는 정말 심장을 쿡 찌르는 말들이 있다. 잊어버릴까 봐 침 놓자마자 달려나와 핸드폰에 적어두기도 한다. 어르신들이 들려주는 옛날이야기들은 늘 신기하고 재밌을 뿐이다. 글 하나는 흠 하나를 남기는 것이라는 글귀를 어디선가 본 이후로는 항상 글쓰기에 조심스럽지만,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부모님께서는 내가 진료에피소드 늘어놓는 걸 항상 가장 재밌게 들으시는데, 퇴근 후에는 피곤하단 핑계로 얘기를 많이 하지는 않는다. 오늘 하루는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매일같이 묻는 남자 친구에게도, ‘별 일 없었지, 뭐’ 하고 말을 아끼곤 한다. 늘 좋은 일만 있는 건 아니라서,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괜한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아서 인 것 같다. 그러다보니 그저 혼자 자기 전에 하루를 한번 더 곱씹고 끝나버린다. 루틴한 삶 속에서 시간이 점점 빠르게 흐르는 것 같아서, 그냥 잊어버리기엔 아까운 나의 젊은 날의 진료기억을 남겨보고 싶었다. 꼭 의학적이지만은 않은 소소한 인생 이야기들 말이다.
한의원에 자발적으로 갇혀서 종일 보내는 하루는 한편으로는 아무 일도 없는 하루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계속 새로운 일이 있는 하루다. 수많은 이야기를 두 어깨에 양손에 허리에 이고 지고 온 환자들과, 다소 오지랖이 넓은 원장이 만난 하루를 살살 써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