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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ㅇㅅㅇ Aug 19. 2020

기회가 된다면 다시 한번

여행의 기록

성인이 되고 나서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여행했던 곳이 적지도 않았지만, 내세울 만큼 많지도 않았다. 혼자 사색을 하며 떠난 여행도 있었고, 누군가와 함께 간 여행도 있었다. 혼자 떠난 여행이지만, 여행 중에 인연이 되어 함께 했던 사람들도 있었다. 늘 여행에는 걱정보다 기대와 설렘으로 가득했고, 현실과 조금 떨어져 있다고 느낄 때 더 행복했던 것 같다. 내 기억에 남아 있는 그 시간들 중 일부를 이번 기회에 기록해보고 싶다.


대부 영화의 배경, 마피아의 도시
이탈리아의 시칠리아 섬

2016년 12월 31일, 한국에서 출발해서 31일에 시칠리아 섬에 도착했다. 비행기 안에서 이미 한국은 2017년 새해를 맞이했지만, 우리가 시칠리아 숙소에 도착했을 때는 카운트 다운을 앞두고 있었다. 짐을 풀기도 전에 집주인의 초대로 현지 외국인 가족들과 함께 와인을 마시며, happy new year 시간을 보냈고, 그렇게 여행은 시작되었다. 다음날 우리는 해변을 따라 조깅을 했고, 추운 날씨였음에도 과감하게 바다에 빠져 수영을 하기도 했다. 한적한 시골 동네였지만, 그런 감성이 좋았다. 현지에서 렌트를 한 후, 제주도의 14배 크기나 되는 그 섬을 6박 7일 동안 필름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그 많은 사진을 백업해두지 못하고, 그 사이 휴대폰도 분실하면서 이제는 기록이 아닌 내 머릿속 기억에만 남아 있는 것은 아닐지 아쉬움이 든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
러시아 하바로프스크 ~ 블라디보스

2017년 여름휴가로 간  러시아 블라디보스톡 날씨는 우리나라의 늦봄이나 초가을 같은 날씨여서 더운 여름을 피해서 놀러 가기에 참 좋았다. 그래서인지 시칠리아 여행과 달리 한국 관광객이 더 많았던 것 같다. 그럼에도 길을 걷다 보면 눈에 띄는 러시아 사람들은 마치 모델 같아서 신기했고, 언제 어디를 가나 사람 구경하는 것이 즐거웠다. 또한, 하바로프스크에서 블라디보스톡까지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탔던 기억을 빼놓을 수 없다. 하룻밤을 기차에서 보내며 이동하느라 불편한 점도 있었지만, 좁은 공간에서 다양한 외국인들과 함께 공유했던 추억들이 그립기도 하다.


최고의 인생 여행, 호캉스
베트남 다낭

2018년 여름, 다짜고짜 비행기표와 호텔을 예약하고 나에게 시간을 비우라며 끌고 간 그 녀석이 지금도 너무 고맙다. 밤낮으로 병원에서는 레지던트 수련, 병원 밖에서는 협회 활동을 하던 나를 묵묵히 응원해주었던 친구가 번아웃 직전의 상태를 도저히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너야말로 치료를 받아야겠다


같은 병원에서 수련받고 있던 동갑내기 정신건강의학과 레지던트 동기는 나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평소에 속 이야기를 잘 안 하던 나였지만, 굳이 말하지 않아도 서로가 표정이나 행동만 보아도 어느 정도 알 수 있었다. 지쳐있을 대로 지쳐있던 나에게 그 친구가 처방했던 것은 진정한 휴식을 즐기는 것이었다. 우리가 인지행동치료를 할 때 환자와 함께 약속하듯, 나도 부딪혀보았다.


이번 여행만큼은 노트북을 챙기지 말 것

읽을 책을 가져가도 좋지만, 심리나 정신분석 등 전공과 관련 있을만한 내용은 제외할 것

휴대폰은 허락된 시간에만 사용할 것


사실 협회 일을 하고 나서부터는 휴가 중에도 업무를 손에 놓지 못해 늘 노트북을 챙겼고, 노트북이 없으면 휴대폰으로 업무를 했다. 정신과 의사가 되고 나서는 책을 읽어도 심리, 정신분석 등 전공과 관련된 책을 들고 다녔고, 그래야 마음이 편했다. 생각해보면 학생 때도 방학이 되면 과외를 하며 용돈을 벌었고, 국토대장정, 봉사활동, 대학생 캠프 등 다양한 활동을 찾아다녔다. 난 스스로를 가만 두지 못하고 뭐가 그렇게 불안했던 걸까.


괜찮아, 너 없어도 세상은 흘러간다


나는 늘 그 친구를 보며 여유로운 태도가 부러웠다. 때로는 너무 태연한 것 아닌가 싶었지만, 스스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에는 누구보다 몰두해서 하는 친구였다. 오히려 그 친구를 보면서 내가 책임감이라는 틀 안에 갇혀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환자 진료뿐만 아니라 어떠한 일도 그냥 넘기지 못했다. 소위 완벽주의에 오지랖도 넓고 강박적이었다고 표현할 정도로.


그런 내가 약속대로 비행기 안에서도, 숙소에 도착해서도 일과 관련된 대화는 하지 않기로 했다. 수영장이 있는 고급 호텔에서 그저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운동을 하고, 수영을 하고, 마사지를 받고 최대한 일에서 멀어지는 게 나한테는 숙제와도 같았다. 생각이 드는 것조차 막을 수 없었겠지만, 어느 순간 나도 하나 둘 내려놓으면서 진정한 여유를 경험할 수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낯선 곳이라서 가능했던 것일까.


난생처음으로 많은 사람들 앞에서 춤을 췄다. 어떤 고민도 없이,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은 채 음악에 몸을 맡겨 흔들어댔다. 내가 잘 추던 못 추던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흥이 났고 마음껏 표현하고 싶었다. 땀에 흠뻑 젖을 정도로 그동안 쌓여있던 스트레스를 날려 보내고 정신을 차릴 때쯤에는 이미 우리가 그곳을 장악하고 있었다. 사람들을 우리를 둘러싸고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고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과연 내가 또 그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 기억은 지금도 강렬하다.


이렇게 떠오르는 기억들을 두서없이 적다 보니.. 해외여행은 언제 갈 수 있을지 너무 멀게만 느껴지는 요즘이다. 하루빨리 코로나 치료제와 백신이 개발되고 안정화되는 그날이 오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고 앞으로 어디든 여행을 가게 된다면, 나를 조금이라도 더 내려놓고 그곳을 충분히 즐길 수 있도록 해야겠다. 물 흐르듯 몸이 가는대로, 마음이 가는대로 말이다.


다시 한번 느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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