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피운 꽃_1
[다시 쓰는 안데르센 세계 명작]

가까운 미래의 이야기

by 이신

사람을 고약하게 만드는 거울 조각은 세상의 천사와 신들에 의해 하나씩 걷어져 갔다. 곳곳에 박힌 수많은 유리 조각의 가루들은 힘을 잃어갔다. 신과 천사를 조롱한 대가로 악마 호브고블린들은 영원히 행복 속에 갇혀 버리는 형벌에 처해졌다. 그런데 그건 신과 천사들의 실수였다. 호브고블린은 사람들의 행복 속에서 괴로워하면서도, 장난을 이어갔다. 그래서 사람들은 너무너무 행복하다가도 언젠가 그 행복이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추워야 피는 꽃


그런데 정말 행복이 한순간 사라진 사람이 있었다. 꽃밭을 지키던 노파였다. 사랑스러운 소녀가 떠났다. 장미꽃, 참나리꽃, 나팔꽃, 그 어떤 꽃도 아름다움을 겨룰 수 없을 만큼 사랑스러운 소녀였다.


노파의 집앞을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 가운데, 왜 그렇게 그 소녀에게 마음이 갔을까…. 노파는 꽃이 가득한 정원을 바라보다 문득 잊고 있었던 감정 하나가 떠올랐다. 차라리 심장이 없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만큼 아픈 감정이라, 집 뒤편 그늘진 곳의 흙 아래 붉은 심장을 꼭꼭 숨겨 왔었다. 노파의 텅 빈 심장의 자리가 갑자기 너무나 공허하게 느껴졌다. 노파는 허겁지겁 집 뒤편으로 달려 나가 차가운 흙을 왼손 오른손 쉬지 않고 파헤쳤다.


그 속에 동그랗고 맑은 피처럼 붉은 꽃 한 송이가 있었다. 꽃 한가운데 노오란 ‘그리움’이란 꽃수술이 잔뜩 맺혀 있었다. 그 꽃을 조심스레 들어 흙을 털어냈다. 그러다 드디어 생각났다. 노파가 소녀를 그토록 곁에 두고 싶던 이유, 소녀의 머리를 매일 빗겨주던 그 빗의 주인. 그 빗의 주인이자 그리움의 주인인 딸이 떠올랐다.


오래 전 이 따뜻한 집에서 사라진 딸. 노파는 다시 밀려오는 노오란 그리움에 사로잡혔다. 노파의 빨갛고 노란 심장은 차가운 그늘에 사로잡혀 따뜻한 꽃밭으로 둘러싸인 집에서 더욱 아프게 느껴졌다.

노파는 햇빛 가리는 모자를 눌러쓴 채 향기롭고 화려한 꽃밭과 인사를 나누었다. 다시 따뜻한 심장을 되찾기 위해 그리운 딸을 찾아 나서려 한다고 했다. 하지만 노파는 딸이 떠난 게 언제인지, 딸의 모습이 어땠는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노파는 혹시나 꽃들이 딸을 기억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꽃들은 아직도 자신들만의 이야기에만 빠져 있었다. 노파는 맨 처음 버들꽃에게 물었다.


“하나뿐인 내 딸이 언제 떠나갔는지, 어떻게 생겼었는지 기억나니?”


“딸? 나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지. 알을 낳았지만, 그 알에서 내 아들이 태어났어. 내 아들은 참 잘생겼었어. 활도 잘 쏘고, 못하는 게 없었지. 좀 못났어도 난 아들을 사랑했을 거야. 아버지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나를 내쫓았지만, 난 어떤 이유에서도 아들을 버리지 않았을 거야. 하지만 내 아들은 너무 잘난 이유로 내 곁을 떠날 수밖에 없었어.”

“그래, 하지만 내 딸은 기억나지 않니?”

“난 내 아들 생각만 해도 벅차.”


이번엔 그리움을 닮은 노오란 개나리꽃이 이야기했다.


“나에게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 하나와 아들 둘이 있었지. 아이들이 먹는 모습만 봐도 배가 불렀어. 돈 벌 사람은 나뿐이었는데, 어느 해는 먹을 것을 구하다 몸이 너무너무 아픈 거야. 아이들은 어두운 나뭇가지처럼 말라만 갔어. 으슬으슬 몸이 아파 아이들과 꼭 껴안고 마른풀을 모아 불을 지폈는데, 곧 따뜻한 봄이 오고 말았지 뭐야? 그 봄이 올 줄 알았으면, 불을 피우지 않는 건데. 이게 내 답이야.”


“역시 내 딸과 관련한 이야기는 하나도 없구나.”


해당화가 어린 목소리로 나섰다.

“나에게도 소중한 가족이 있었어. 어여쁜 내 누님. 누님만 있으면, 세상 그 누구도 부럽지 않을 만큼 든든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나라에서 나온 사람들이 바다 건너로 누나를 데려갔어. 바닷가에서 하염없이 누님을 기다렸지. 누님이 마지막으로 지어준 붉은 옷이 정말 멋지지 않니? 나에게도 하나뿐인 누님이었는데, 누님도 날 생각하고 있을까?”

“누님도 분명히 널 생각했을 거야. 하지만 내 딸을 기억하는 꽃은 아무도 없구나.”


노파는 가만히 허리를 일으켜 지팡이를 쥐고 마당 끝 문으로 다가갔다. 이 문을 나서 다른 먼 곳으로 떠난 적이 있던가. 노파는 순간 두려운 마음이 들었지만, 그래도 걸쇠를 풀고 넓은 세상으로 나아갔다. 나무 병정 둘에게 집을 지켜달라 부탁하고 뒤를 돌아 꽃밭을 지켜봤다.


“꽃들아, 떨어지는 빗물과 다가오는 벌과 나비들과 함께 잘 지내고 있으렴. 나도 내 이야기, 내 딸을 찾아올게.”




한 걸음 뗄 때마다 딸에 대한 기억이 하나씩 나기 시작했다.


한 걸음

“내 딸은 꽃밭에 윙윙거리며 나는 벌들을 좋아했어. 노랗고 검은 꿀벌의 옷을 특히 좋아했지. 꿀벌처럼 빠르게 날고 싶다고도 했어. 기억나.”


두 걸음

“내 딸은 낱말 맞추기도 좋아했어. 화려한 꽃을 모아 좋아하는 단어를 만들곤 했지. 가끔 웃긴 단어를 만들었다며 보여주고 꽃들과 깔깔거리며 웃곤 했어.”


세 걸음

“내 딸은 겨울을 늘 궁금해했어. 매일 한 번도 본 적 없는 눈과 얼음을 보러 떠나고 싶다고 했지. 내 딸은 눈밭을 찾아 떠났어.”


노파 뒤에는 하얀 지팡이가 만드는 작은 온점들이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