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피운 꽃_2
[다시 쓰는 안데르센 세계 명작]

덜 가까운 미래의 이야기

by 이신

[다시 쓰는 안데르센 세계 명작]

까마귀와 여왕


정원 밖 세상을 오래오래 걷는 건 노파에게 아주 힘든 일이었다. 초록 동산을 지나고 갈색의 땅을 건너 새하얀 눈밭 위를 한걸음 움직일 때마다 발바닥이 끊어질 듯 아팠다. 적은 마법을 부릴 수 있는 덕분인지 추위와 배고픔은 가셨지만 몇 날 며칠이 지나는지도 모르는 채 노파는 쉬고 또 쉬며 걸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하얀 눈사람에 콕콕 박힌 눈알처럼 새까만 새가 다가왔다. 이상한 까만 양털 조각으로 뒤덮인 까마귀도 어딘가 지치고 외로워 보였다.


“까악, 까악! 인생에서 멋진 까마귀 날이 나에게도 오다니!”


까마귀는 왠지 노파의 눈에서 자신과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이 추운 날 노파가 무엇을 찾아 어디로 가는지 물었다. 노파는 ‘무엇을’이라는 말에 까마귀가 무엇을 묻는지 이해했다. 까마귀에게 자신의 딸을 열심히 설명하고, 딸을 본 적 없는지 물었다. 까마귀는 한창 고개를 갸우뚱거리다 말했다.


“어쩌면 봤을 수도, 어쩌면 그럴 수도!”

“정말 내 딸을 봤단 말이지?”


노파가 지금껏 내뱉은 말 중에 가장 높고 밝은 목소리로 물으며, 까마귀를 끌어안고 덩실덩실 춤을 출 기세였다.


“당신의 딸일 수도, 아니면 아들일 수도. 하지만 이제 기억하는 까마귀는 나뿐이야!”

“네가 본 게 여자란 거야. 남자란 거니.”

“기다리고 천천히 들어봐! 혹시 까마귀 말을 알아들을 수 있나?”

“그래. 내가 사는 곳의 까마귀 말이라면 들을 수 있지. 하지만 이렇게 추운 곳에 사는 까마귀 말을 들을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까마귀는 자기가 기억하는 이야기를 모두 내뱉기 시작했다.


“아주 지루한 날들이었지. 어제가 오늘인지, 내일이 오늘 인지도 헷갈리는 나날이었어. 그러다가 아주 하얗고 예쁜 소녀가 이 눈밭에 나타난 거야. 아니 까무잡잡한 소녀였나? 내가 직접 만났다면 좋았을 걸! 소녀는 누군가를 찾고 있었어. 아니 무언가를.”

“눈을 찾았던 게 아닐까?”

“눈이었을까? 눈의 여왕이었을까? 이제 기억하는 까마귀는 나뿐이야. 그래, 더 추운 곳 아주아주 추운 곳으로 가려고 했어. 눈밭이 아닌 눈으로 덮인 산을 보러 가야 한다고 했지. 어여쁜 소녀였는데, 가다가 산속에 사는 험한 산적을 만났을 수도 있는데. 아니 이미 만났던가. 주의를 준다는 걸 깜박 잊었지 뭐야.”

“그 길이 어딘지 알려줄 수 있니?”


그때 갑자기 뒤쪽에서 말발굽 소리가 음악 소리를 점점 키우듯 가까이 들려왔다.



“왕이다! 지혜로운 여왕이 여행에서 돌아왔어!”

까마귀가 신이 나 빙빙 돌며 외쳤다. 금빛 옷을 입은 군인들을 앞세우고 가던 화려한 백합 모양 마차와 멋진 갈기를 자랑하는 하얀 말이 노파 앞에 멈춰 섰다. 진홍색 꽃잎의 문을 열고 새하얀 발이 마차 아래로 내려왔다.


“어찌 이 먼 곳까지 오셨나요. 물의 어머니.”


노파는 놀라 여왕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나를 알아보았나요. 아주 오랫동안 세상에 나오지 않았는데.”

“전 아주 많은 것을 읽고 배웠습니다. 세상의 모든 꽃에 둘러싸인 곳에 사는 ‘물의 어머니’의 이야기도 들었지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 그림이 그려진 모자와 하늘의 뭉게구름만큼 새하얀 지팡이를 보고 알았습니다. 따뜻한 그곳에서 어떻게 춥고 먼 곳까지 오셨나요?”

“딸을 찾아 떠나왔습니다. 혹시 제 딸이 이 나라를 지나가진 않았나요.”

“물의 어머니에게 딸이 있다는 이야기는 처음 들었네요. 우리나라에는 아주 많은 사람이 지나다니기 때문에, 인상착의와 특징을 말해주신다면 사람을 시켜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얼마 전 용감한 소녀가 제 방을 찾아오긴 했습니다만, 라플란드로 향한 이후로 소식이 끊기고 말았습니다. 일단 너무 피곤해 보이시는 걸요. 저희 궁으로 함께 가 좀 쉬신 다음에 떠나시는 게 어떨까요.”

“말씀은 감사하지만, 한시라도 빨리 제 딸을 보고 싶어서요. 쉬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네요. 그 얘기를 들으니 더욱 마음이 조급해집니다. 이렇게 오래 돌아오지 않고, 소식도 없는 걸 보면, 어디 추운 곳에 갇혀 있는 건 아닌지 너무 걱정이 드는군요.”

“그럼 저희 궁에서 하룻밤만 묵어주신다면, 그동안 사람을 시켜 딸을 본 사람이 없는지 수소문해보겠습니다. 걱정 마시고 하루만 묵어가시지요. 까마귀 너도 부엌이 아닌 왜 이 먼 곳까지 나와있느냐. 함께 어서 들어가자.”


노파와 까마귀는 함께 백합 모양의 마차에 몸을 실었다. 마차 안은 아주 아늑하고 따뜻했다. 커다란 황금 줄기와 크리스털 잎이 마차의 천장을 장식해 반짝이고 있었다. 그 마차 안에는 국서가 앉아 있었다.

“까마귀야. 먼 곳까지 산책을 나온 모양이구나. ‘물의 어머니’가 맞으신가요. 멀리서 모자와 지팡이를 보며, 여왕께서 궁금해하셨습니다.”


세 사람, 세 사람과 까마귀는 노파의 딸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며 궁으로 향했다. 여왕은 궁에 도착하자마자 신하들을 불러 모아, 노파의 딸을 찾도록 했다. 노파는 아주 오랜만에 따뜻한 곳에서 푹 잠들 수 있었다. 아주 친절하고 사랑이 넘치는 곳이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노파의 딸을 본 이는 아무도 없었다. 노파는 다시 몸을 일으켜 떠날 채비를 했다.


“라플란드로 가시는 것이지요. 라플란드는 뼛속까지 얼어버릴 정도로 아주 추운 곳입니다. 저희가 준비한 벨벳의 외투로 갈아입고 가시지요. 이번엔 산적 떼에 당하지 않도록, 병사 두 명도 함께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받고만 떠나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제 아름다운 꽃 모자라도 받아주시면 어떤지요. 이 모자는 제가 가는 곳에는 어울리지 않네요. 다시 제 꽃밭으로 돌아가 새로운 모자를 만들어 쓰면 된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모자를 제가 받아도 될까요.”

“저에게 이제 딸을 찾는 일 빼고는 아무런 욕심도 없습니다.”


그때 갑자기 까마귀가 나섰다.


“나도. 나도 아주 추운 나라로 떠날래요. 내 사랑도 이곳에 없고, 나도 검은 양털로 둘러 추위를 견딜 수 있어요.”


노파는 그렇게 까마귀와 함께 떠나게 되었다. 까마귀는 신이 나서 하늘을 빙글빙글 돌았다. 노파는 이제 마차에 몸을 싣고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여왕님은 당분간 여행은 조심히 다니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여왕님의 뱃속에 아름다운 생명의 기운이 가득하네요.”


여왕은 놀란 눈을 하다 무척 기뻐했다. 까마귀와 많은 사람의 배웅을 받으며 노파는 마차에 몸을 싣고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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