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피운 꽃_6
[다시 쓰는 안데르센 세계 명작]
디시 가까워진 이야기
눈의 여왕과 만남, 겨울 이야기
소년이 떠난 이후로 눈의 여왕의 궁정은 더욱 거센 눈바람과 추위로 가득했다. 살을 에는 바람에 눈의 여왕의 분노와 슬픔이 느껴졌다. 궁정은 구름 속에 숨은 산봉우리처럼 커다란 오로라로 둘러싸여 있었다. 텅 빈 눈의 방 한가운데 꽁꽁 언 호수 가운데 눈의 여왕이 앉아 있었다. ‘이성의 거울’ 위에서 눈의 여왕은 감정을 버리고 이성을 되찾으려 하고 있었다. 얼음조각을 움직이며, 여러 단어들을 만들려 하고 있었다. 세상은 여왕의 손에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걸 여왕도 잊고 있었다.
매일 꽃밭을 돌보며 따뜻한 곳에 살던 노파는 겪어본 적 없는 추위였다. 입술은 본 적 없이 파래졌다. 가만히 있어도 몸이 오들오들 떨렸다. 하지만, 딸을 찾기 위해서는 눈의 여왕을 만나야 했다. 백 개가 넘는 방을 하나하나 돌아보며 여왕을 찾아다녔다. 그러다 드디어 눈의 여왕이 앉아 있는 얼음 호수를 발견했다.
“당신이 눈의 여왕인가요?”
눈의 여왕은 밝은 별 같은 눈동자를 빛내며 노파를 바라보았다. 아름답지만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은 눈이었다. 노파는 그 순간 주저앉고 말았다. 딸이었다. 그렇게 오래 그리워했던 딸이 그 차가운 호수 가운데 외롭게 앉아 있었다. 하지만 눈의 여왕은 아무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아무런 감정도 없이 조용히 바라만 보았다.
“내 딸. 내 사랑하는 딸.”
노파는 이전보다 더욱 떨리는 몸을 이끌고 호수 위를 건넜다. 견딜 수 없는 추위에 몸속에 모든 물이 어는 듯했다. 노파가 쥔 하얀 지팡이가 끓는 냄비 위의 뚜껑처럼 호수를 진동하게 했다. 노파는 한 걸음, 한 걸음 눈의 여왕에게 다가갔다. 눈의 여왕은 여전히 아무런 말도, 감정도 없이 노파를 바라볼 뿐이었다. 눈의 여왕은 이미 모든 것이 얼어버린 후였다. 예전의 기억은 모두 깊은 얼음 속에 가두어졌다. 눈의 여왕은 물의 어머니이자 자신의 어머니를 알아보지 못했다.
“눈밭을 구경하러 간다더니. 구경은 즐거웠니? 내가 너를 너무 오래 잊고 살아 널 이렇게 외롭게 두었구나. 내 아픔을 잊겠다고 너까지 물처럼 흘려보내 버리고 말았어. 정말 미안해.”
이제 노파는 눈의 여왕 앞에 서 있었다. 조용히 눈의 여왕이 맞추던 낱말을 바라보았다. ‘영원’이라는 글자 주위로, 아무 글자도 맞춰지지 못하고 있었다. 노파는 울고 싶었지만 눈물마저 얼어 아무것도 흐르지 않았다. 노파는 조용히 눈의 여왕의 감정 없는 눈을 바라보았다. 찰랑거리는 물처럼 빛나던 딸의 눈빛은 없었다. 그때 심장의 꽃이 파르르 떨렸다. 노파는 조심스레 따뜻한 장갑으로 심장을 감싸 꺼냈다.
“이 꽃 기억나니? 유일하게 우리 집에서 추운 곳에서 피는 빨간 꽃이라며 좋아했잖아. 기름을 짜 머리에 바르기도 하고. 네가 눈을 보러 떠나고 이 꽃에 심장을 담아 숨겨 놓았단다.”
그래도 여왕의 눈빛에는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눈의 여왕은 마치 앞에 아무것도 없는 듯 무표정으로 바라만 보았다.
눈의 여왕은 아주 오래전 집을 떠나 눈을 구경하러 이곳으로 왔다. 형형색색의 꽃만 보다가 저 멀리 나무에 핀 반짝이는 무색무취의 눈꽃들이 눈을 사로잡았다. 눈꽃을 가까이서 구경하고 싶었지만, 다가가기만 하면 눈꽃이 녹아내리고 잎이 돋았다.
눈의 여왕이 여왕이 되기 전에는 너무나 따뜻한 마음을 가진 소녀였다. 소녀는 푸르르게 젊고, 노파가 추운 곳에 가는 딸을 걱정해 너무 따뜻한 물을 몸속에 넣어 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 하필 그곳에 호브고블린이 지나치고 있었다. 아름다운 소녀를 보자 호브고블린은 장난을 치고 싶었다. 호브고블린은 눈꽃을 만지고 싶어 하는 소녀의 마음을 이용해, 소녀를 아주 차갑게 얼려버렸다. 따뜻한 물을 품고 있던 소녀는 너무 빨리 꽁꽁 얼어버렸다. 기억도, 마음도 모두 단단하게 얼어버리고 만 것이다. 눈앞에 놓인 눈꽃과 물의 어머니의 딸로 쓸 수 있던 약간의 마법이 남아 ‘눈의 여왕’이 되었다.
노파는 조용히 그 꽃을 가만히 들어 눈의 여왕 뒤로 갔다. 조용히 꽃으로 딸의 머리를 빗겨주었다. 예전 딸의 머릿결을 쓰다듬어주던 것처럼 몇 번이고 쓸어주었다. 노파의 심장인 그 꽃은 눈의 여왕의 머릿결에 닿자 점점 하얀 성에가 피며 얼어갔다. 노파의 손끝도 점점 차가움에 검어져 갔다. 그때 갑자기 눈의 여왕의 눈에 따뜻한 눈물이 터져 나왔다. 머리를 쓰다듬을수록 얼었던 머릿속 기억이 녹아내려 툭툭 튀어나왔다.
눈의 여왕이 마침내 뒤를 돌아보았을 때, 노파는 얼음 동상이 되어 있었다. 눈의 여왕은 다시 예전의 그 따뜻한 물을 가진 소녀로 변했다. 눈물이 쉬지 않고 흘러내렸다. 흘러내린 눈물은 언 호수를 녹이고 있었다. 소녀는 얼음 동상이 된 노파를 끌어안았다. 얼려진 기억 속에도 너무나 보고 싶었던 엄마였다. 눈꽃만 만져보고 돌아가려 했던 엄마의 품이었다. 초록색, 노란색 오로라의 빛이 노파의 얼음 동상을 번갈아가며 비추었다. 그때 동상이 서있던 얼음 한 조각과 함께 호수로 녹아내렸다. 노파의 얼음 동상이 꽁꽁 언 호수 아래 물로 떨어졌다. 소녀는 놀라 동상을 건져내려 했지만, 동상은 너무 미끄러워 점점 저 아래로 빠졌다.
소녀는 울고 또 울었다. 점점 모든 호수가 녹기 시작했다. 이제 소녀가 올라탄 얼음 조각 빼고 모두 물로 변했다. 그때 갑자기 저 멀리 빨간 꽃 하나가 물 위로 떠올랐다. 소녀는 재빨리 얼음 조각을 타고 그곳으로 향했다. 빨간 꽃을 건져 올리고 장맛비 같은 눈물을 쏟았다. 그때 물이 말이 걸었다. 그 소리가 궁정 전체를 울렸다.
“내 딸. 이제 엄마가 언제든 찾아올 수 있게 되었구나. 너의 궁정에 내가 머무를 수 있는 곳이 생겼으니 이 물을 타고 자주 놀러 올게. 이 물이 곧 나란다. 나를 보고 싶을 때면 이 호수를 바라보렴. 눈의 여왕이 사라지면, 북극의 곰들과 아름다운 설산은 누가 돌보겠니. 따뜻한 물을 가진 눈의 여왕으로 살아가렴. 네가 춥지만은 않다는 걸 알려줘. 그리고 더 이상 네가 외롭지 않게 말이야.”
물의 어머니, 노파는 물을 타고 꽃밭으로 사라졌다. 이제 눈의 여왕이 지나는 곳은 마음이 얼어붙을 정도로 춥지 않아 졌다. 사람들은 눈의 여왕이 지나가는 곳에서 따뜻함을 느낄 수 있었다. 겨울이 품은 추운 집이나 어려운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도 따뜻함이 느껴졌다. 눈의 여왕도, 사람들의 겨울도 더이상 춥고 외롭지만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