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 경기 중 - 탈피 脫皮 [첫 번째 이야기]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지루한 칭찬, 지루한 매일
모든 초등학생이 그러하듯, 7시 반에 침침한 눈을 비비고 겨우 일어나 넘어가지도 않는 밥과 국을 반강제로 들이마시다시피 하고 학교에 갔다. 나는 우리 학교에서 천재로 소문이 자자했다. 혹자는 "초등학교 때는 누구나 다 천재 소리 한 번씩은 듣고 컸다."라고 할 텐데, 나는 초등학교 2학년 때 담임선생님께서 단원평가 서술형 문제 채점을 맡기는 정도의 천재였다. 한 번은 집에서 쓰던 일기를 방학숙제로 제출했더니 담임선생님은 “일기 대신 써주시는 거 아닙니다. 부모님 욕심이 계속되면 아이를 망칩니다.”라며 다짜고짜 엄마를 다그친 적도 있었다. 그 정도였다.
이렇듯 나는 초등학교 입학 후 4년 동안 학업으로 받을 수 있는 찬사는 모두 받아봤다. 처음 입학했을 때는 칭찬을 듣는 것이 너무 행복했다. 고래도 춤을 춘다는 데 나 역시 칭찬을 들은 날이면 너무 좋아서 집에 돌아와 난리를 피웠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나는 익숙함에 속아 소중함을 잃었다. 칭찬에 대해 더 이상 긍정적으로 반응하지 않았다. 또래들이 겨우 한글을 쓰고 읽을 때 한자로 일기를 쓰고, 그들이 구구단을 이해할 때 아빠에게 원주율 개념을 배워 ‘3.14, 6.28, 9.42, 12.56......’을 기계식으로 암기했던 나였다. 따라서 어른들의 칭찬은 어렸을 적 고생했던 나에 대한 당연한 찬사쯤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이 ‘투니버스’, ‘챔프’ 등의 만화 채널을 마음대로 오가며 즐거워할 때 나는 아빠의 눈을 피해 새벽이 되어서야 '토마스와 친구들' 재방송을 켰으니 또래들보다 이 정도 우위에 있는 것은 어찌 보면 마땅한 일이었다. 학교에서 배우는 것들 모든 것이 애들 장난쯤으로 여겨졌다. 코 밑에 수염은커녕, 솜털이 거뭇하게 변하기도 전에 학업을 통달한 듯 행동했던 당시의 나는 무척 거만한 모습이었다.
공부라면 신물이 났던 나는 탈출구를 찾고 싶었다, 아니 찾아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정신이 이상해질 것만 같았다. 마침 그 시기에 나의 두 양육자가 떠났으니, 나는 이때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찾지 못한다면 평생을 순종적인 사내로 살아야 할 것 같아 슬슬 변화를 꾀할 준비를 시작했다. 소위 말하는 범생이 친구들 사이에서만 시시덕거리는 것은 너무 무료했다.
그리하여 나는 자극을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나를 케어할 사람은 엄마 단 한 명뿐. 한 명의 눈만 피하면 된다니, 탈출의 기반은 충분히 마련된 상황이었다.
내가 자극을 찾아 떠나기 시작한 시기는 초등학교 5학년 봄이었다. 그 시기에 다른 친구들은 학교가 끝나면 운동장 스탠드에 실내화 가방을 내팽개치고 공놀이를 했고, ‘넥슨’의 노예가 되어 PC방에 줄지어 앉아있었다. 하지만 나는 하루 평균 네 곳의 학원을 다녀야 했다. 친구들이 “빠박아(당시 나의 별명) 놀자!”라고 하면 나는 매일같이 미안한 표정으로 학원을 가야 한다며 쓴웃음을 삼켜야 했다.
학원에 가면 고등학생과 한 반에 묶여 원어로 쓰인 미국 독립선언문을 배웠다. 당연히 수업 이해도는 10퍼센트도 채 되지 않았다. 허구한 날 존다고 쩌렁쩌렁 윽박을 지르고 경고장을 날리던 원장을 생각하면 아직도 진절머리가 난다. 그때 그 경고장은 또 얼마나 무섭게 다가오던지, 학원 엘리베이터 앞에 ‘최준혁; 수업태도 불량으로 400포인트 차감’이라 써붙이는 게 뭐라고 그렇게 조마조마했던지, 게다가 그 포인트는 3개월에 한 번 학원에서 진행하던 달란트 마켓(학용품 쇼핑몰)에 사용되는 것일 뿐이었는데 말이다.
수업내용을 알아먹을 수는 있어야 발전하는 스스로를 발견하면서 보람이라도 느낄 텐데, 학원 강사들과 우리 부모님은 나를 아주 과대평가하고 있었다. 일단 제일 중요한 것이 나는 별로 공부를 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고, 뭘 이리 배우라고들 난리를 피우는지 깨닫지도 못했다. 이렇게 받은 스트레스들이 쌓이고 쌓이면서 나는 친구들과의 시간을 선망하기 시작했다. 한두 번 엄마를 졸라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 본 결과 역시 그곳은 아주 달콤한 곳이었다. 그렇게 나는 엄마 몰래 이 무료한 쳇바퀴 밖으로의 탈출을 준비했다.
+PLUS+
교육에 대한 열의가 넘치는 부모 밑에서 크는 아이들 중 일부는 양육자의 뜻대로 순순히 커가다가 한순간에 반항 기질을 보인다. 부모의 경제적ㆍ정신적 투자에 비해 턱도 없는 학업 성적을 거두고,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엇나가는 모습은 흔하다. 이때 부모는 아이의 일탈에 대한 원인을 찾기 시작한다. 본인의 교육방식을 의심하기도 하고, 아이의 내면에 숨겨진 속내를 파헤치려 애쓰기도 한다. 하지만 부모가 사춘기 이전의 아이를 쉽게 컨트롤할 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하다. 아이가 자극에 노출될 기회가 없었고 아이가 집 밖의 타인과 함께하며 경험한 재미와 자극의 양이 적고 빈도가 낮기 때문이다.
아이가 부모 이외의 사람들을 접하며 집에서 느끼지 못했던 쾌락을 느끼고, 그 교류를 통해 본인도 원하는 삶을 지향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것을 아는 때부터, 부모와의 마찰이 시작된다. 그 마찰은 지극히 정상적인 것이므로, 피하려 해서도 마찰 간에 부모의 권위를 내세워서도 안 된다. 그렇다면 그것은 억압이고 아이를 계속해서 옥죄는 형상에 지나지 않는다.
‘내 자식은 어리지만 나를 닮아서 어떤 행동이 본인의 미래에 도움이 되고 해가 되는지 분별을 할 수 있는 현명한 아이야.’라는 생각은 자녀에 대한 과대평가다. 공자와 맹자도 그 시기에는 딱지를 빳빳이 접어 친구의 딱지를 따 먹으려고 혈안이 되어 다녔을 것이다. 더하여, '우리 딸, 우리 아들은 원래 어렸을 때부터 순했던 아이였어.', '우리 아이는 어렸을 때부터 내 말을 잘 들었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자녀가 머지않아 다시 본인의 기대에 부응할 것이라는 생각 역시 기약 없는 소망이자, 부모에게 상실감만 안기는 안일한 시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