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준혁 Jul 09. 2021

완벽에 가까웠던 아이는 나락으로

Chapter 2. 경기 중 - 탈피 脫皮 [네 번째 이야기]

 손마디가 부르트고 온 몸에 파스칠을 할 정도로 운동을 했으니 실력이 좋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 가지 아쉬웠던 것은 제대로 된 농구 전문학교나 갖추어진 시스템 속에서 하는 운동이 아니었던지라 몸이 쉽게 상하기 일쑤였고, 이 탓에 운동의 효율도 그렇게 높은 편이 아니었다는 것. 하지만 어찌 되었든 나는 농구를 통해 예상치 못한 반가운 상황을 하나둘씩 마주할 수 있었다.


 제일 반가웠던 것은 유명세였다. 이전까지 나를 아는 사람이라고 해봤자 가족들과 학교 선생님들 내지는 반에서 같이 시시덕거리는 친구들 몇 명이 전부였다면, 내가 시합을 나간다거나 동네에서 또래들과 자주 운동을 하면 할수록 마을 또래들이 나를 알아봐 주었다. 옆 동네의 또래들이 나와 겨루기 위해 우리 집 앞 농구장에 모였고, 시작한 지 3년째 되던 해에는 김포시에서 ‘농구’하면 내 이름이 제일 먼저 나왔다. 가장 좋았던 점은 ‘나는 A를 모르지만 A는 나를 아는 상황의 반복’이었다는 것이다. 유명인들이 느끼는 희열이란 이런 것인가 싶었다.


 앞서 말한 대로 제대로 된 농구 전문학교나 훈련을 담당해주는 코치가 없어 다듬어지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또래들의 인기를 얻기에는 충분한 정도의 실력이었다. 그래서 매일 겉모습은 꼬질꼬질 더러운 꼴을 하고 다녀도 마음만은 너무나 풍요로웠고 자신감에 차 있었다. 내가 사랑하는 분야에서 인정을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벅찬 일인지를 느꼈던 첫 시기였다.


 또 하나 얻은 것은 신체적 변화와 이로부터 파생된 몇 가지 이점들이다. 초등학교 4학년 때의 신체검사표를 보면 키는 144센티, 몸무게는 40킬로로 쓰여있다. 좁은 어깨에, 또래들보다 작은 키에, 성격은 또 얼마나 여렸던지. 아주 가끔씩 화가 나면 이를 주체할 수 없어서 소리를 쳐댈 정도의 성깔은 있었지만 아마 그때의 나를 겪었던 사람들은 아마 ‘뽀얗고 착한 모범생’으로만 기억할 가능성이 높다. 친구들을 휘어잡는 기술이라거나, 리더십을 발휘하는 방법은 당연히 몰랐다. 그냥 또래보다 똑똑한 평범한 아이였다. 공부 이외에 뛰어난 구석이라고는 제로였다.


 그러다 운동을 시작하니 남자가 되기 시작했다. 땡볕에 하도 구르며 자연 태닝을 한 탓에 피부는 황인보다 히스패닉의 색에 가깝게 변했고, 반에서 제일 넓은 어깨의 소유자가 되었다. 농구를 처음 시작한 열두 살 때부터 2년 산간에 키는 25센티가량이 자랐고 왜소했던 나는 어느새 학교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장신이 되어있었다.


 갑자기 이러한 겉모습을 얻으니 점차 거만해져 갔다. ‘개구리가 올챙이 적 생각을 하지 못한다’라는 옛 속담은 틀린 구석이 하나 없다. 팔뚝도 굵어지고 힘도 세지다 보니 괜스레 어깨에 힘을 주고 걸었고, 농구가 좋으면 농구만 하면 될 것을, 괜히 친구들 앞에서 팔씨름이나 턱걸이를 해대는 등 내 힘을 자랑할 수 있는 영양가 없는 짓들을 습관처럼 반복했다.


 외양이 커지니 무식하고 단순한 중학생 남자 놈들은 나를 함부로 건들지 않았다. 중학생 남자아이들에게 학교란, 학교라기보다는 ‘동물의 왕국 인간판’에 가깝다. 멀쩡히 아무 잘못 없는 놈도 ‘약자’라는 낙인이 찍히면 한없이 저 나락 끝까지 매장당하는 곳이 바로 남학생의 중학교다. 나 역시 만약 운동을 하지 않고 계속 왜소한 모습으로 머물렀다면 맛 좋은 먹잇감이 되었을 텐데 참으로 운이 좋았다.


 한 번은 복도를 걷다 소위 말하는 ‘일진’에 속하는 한 놈이 “야, 쟨 건들면 안 돼. 운동 진짜 잘하잖아. 운동하는 애들은 진짜 세.”라며 말하는 것을 들었다. 고작 공을 튀기는 중학생이 싸움을 잘할 것이라고 예단하는 그놈이나, 지나가면서 그 소리를 듣고 괜스레 ‘나 좀 센가?’ 생각하며 양 어깨가 하늘 위로 승천했던 나나, 그 우매함은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였다.


 아무튼 그 당시에는 예상치 않게 물리적인 힘도 인정받은 상태였고, 농구장에 가면 환호도 받을 수 있었고, 김포에 사는 남자아이들 중 운동에 관심이 있는 아이들 대부분은 내 존재를 알았고, 서서히 자신감을 얻고 친구들 사이에서 중심이 되는 법도 깨달았으니 찌질했던 어린 시절의 나는 서서히 영향력 있는 학생이 되어갔다.


 내가 세상에 나와 처음 꾼 꿈을 이루려 시작한 일이지만, 단순히 마음이 가는 대로 행동한 것에 따른 부의 효과(-)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불어났다. 공부는 타고난 줄 알았던 내가 초등학교 6학년 1학기 중간고사에서 받았던 평균점수는 68점, 38명 중 28등. 시험문제를 열심히 푸는 눈앞에 친구들이 우스웠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처럼, 시험 종이 울리면 대충 눈으로 풀 수 있는 것들로만 골라서 답을 적고 나머지는 그날 마음에 드는 번호로 쭉 밀어버렸다. 1년에 네 번, 입학 후 5년 동안 보았던 총 스무 번의 지필고사에서 틀린 문제 개수의 총합보다 그날에 틀린 개수가 더 많았다. 담임선생님은 급기야 엄마를 호출하여 내가 많이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다며 경고를 주었다. 가방에는 농구공 하나밖에 들어있지 않다는 사실과, 학교에서 거친 아이들과 어울린다는 것과, 행실이 올바르지 않다는 사실 모두가 엄마의 귀에 들어가고야 말았다. 그리고 엄마가 학교를 다녀온 그날, 여느 날과 같이 그날도 새카매진 손에 소금이 핀 티셔츠를 입고 밤 아홉 시쯤 집에 들어갔다.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불길한 기운이 엄습했는데, 역시 예감은 들어맞았다.


 엄마가 물었다.

“너 요즘 학교에서 막 나간다며?”

내가 침을 꼴깍 삼키는 소리는 분명히 엄마 귀에도 들렸을 거 같았다.

“아니야, 나 열심히 하고 있어.” 바로 거짓말을 했다.

“너 농구선수할 거야?”

“응”

  엄마는 갑자기 일어나 부엌에서 칼 하나를 꺼내 들고 오더니, 내 방에 있던 농구공을 반으로 갈랐다. 그리고는 소리쳤다.

“그렇게 어렸을 때는 말을 잘 듣더니 이제 와서 뭐? 농구선수를 한다고? 제발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인생이 그렇게 쉽니? 왜 사람 가슴을 후벼 파는 소리를 하고 있어!”


  물론 농구선수를 한다고 하면 엄마가 당연히 반대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막상 엄마가 강하게 반대하는 모습을 직접 보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이어 내가 말했다.


“나 정말 공부하기 싫어. 그동안 엄마 아빠가 하라는 거 다하고 어른들 말만 듣고 살았어. 그런데 나 진짜 이렇게는 그만 살고 싶어. 농구가 좋아. 농구선수가 하고 싶어. 내가 태어나서 처음 가진 꿈이야. 공부 안 해도 돼. 뭐 하려 해? 농구만 원 없이 할 수 있다면 죽어도 좋아!”


 내가 원하는 방향에 대해지지를 받지 못하는 상황을 억압으로 받아들였다. ‘나는 맞고 남은 틀리다.’는 흑백논리를 펴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흑과 백이 겹쳐 만드는 회색 부분은 존재하지 않았다. 오로지 나만이 맞았고, 쓴소리까지 해가며 나를 도우려는 소중한 사람들을 적으로 여기기에 이르렀다.


 억압에서 어떻게든 벗어나 보기 위해 발버둥을 쳤다. 그 시기에는 혼자 새벽에 나가 공을 튀기는 것으로도 날 선 감정이 사그라들지 않았다. 그래서 나돌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쌓이는 무언가 모를 답답함을 곳곳에 분출하기에 이르렀다.


 일단 월 4만 원짜리 복싱장 야간반에 등록해서 내가 밤에 집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명분을 마련했다. 밤에 밖에 있는다는 것은 곧 자유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3년 동안은 반쯤 정신이 나간 채로 바깥을 활보했다. 무서운 경비아저씨가 상주하신다고 소문난 상가에 친구들과 함께 잠입해 소란을 피운 다음 도망을 다녔고, 음침한 뒷산과 폐가에 들어가 온 난리를 쳤다. 이외에도 머릿속에 상상만으로 자리할 법한 일들을 모조리 실행에 옮겼다. 남들에게 피해를 주는 일이 얼마나 못나고 추잡한 짓인지 그때는 깨닫지 못했다.


 학교에서도 역시 나는 문제였다. 사소한 행동들부터 이기심에 찌들어 있었다. 수업 중에는 시답잖은 질문들로 수업 분위기를 흐렸고, 수업이 재미없으면 교실 맨 뒷자리에서 친구들과 노닥거리며 친구들을 방해했다. 하물며 점심시간에도 문제였다. 급식차가 오면 선생님께서 짜주신 순서와 상관없이 같이 놀던 친구들과 함께 제일 먼저 양껏 퍼서 먹었고, 뒷 차례로 배식을 받는 친구가 정량을 받지 못해도 그것은 내가 신경 쓸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내가 가장 센 줄 알았고, 그 누구도 무섭지 않았다. 너무나 부끄러운 일이지만 나의 2011년도는 이기적이었고 매우 형편없었다.


 점점 나의 비행이 동네에 알려지고, 어른들은 나를 주시하기 시작했다. 소문은 돌고 돌아 엄마의 귀에까지 들어갔고, 급기야 학교에서는 나의 행동을 통제하기 힘들다는 판단 하에 엄마를 호출하기에 이르렀다. 엄마는 그 해에 학생부에 네 번이나 호출되었다. 친구들과의 다툼, 장난이 심해져 파손된 기물, 수업을 빼먹고 학교 탈출 감행 등 이유는 각양각색이었다. 엄마는 타지에 나가 고생하는 아빠를 대신해 아들이 저지른 기행을 모두 짊어지는 중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피가 끓었다. 그래서 내 모든 것을 바쳤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