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경기의 시작 - 탄생 誕生 [세 번째 이야기]
- 공부는 놀이가 될 수 있을까요
시중에 쏟아져 나오는 육아서적을 들여다 보면, 대개 초반부에 관례처럼 등장하는 구절이 있다.
‘아이들로 하여금 공부를 놀이로 느끼도록 해라.’,
‘놀이식 공부’,
‘공부에 아이의 관심사를 가미하라.’
본인의 의사를 제대로 피력하기에는 턱없이 어린 아이들의 입에서 “나는 공부를 놀이로 느껴.” 혹은 “엄마의 놀이식 공부법은 매우 효율적이야.”라는 말이 나오는 것은 사실 불가능에 가깝다. 이러한 말들을 할 수 있는 미취학 아동이 없다고 가정할 때, ‘놀이식 공부’의 효율을 검증하기는 쉽지 않다. 자녀양육서들은 놀이식 공부의 효과에 관해 확신에 찬 모습으로 강조하지만 나는 인정할 수 없다. 일련의 연구 결과가 ‘효과 만점 놀이식 공부’에 관한 근거를 제시하더라도 말이다. 어떠한 연구든, 이들은 경향성을 예견하는 것일 뿐 예외는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저마다의 능력ㆍ적성ㆍ흥미ㆍ욕구ㆍ가치관 등을 가진 아동들에게 특정 교육 방식을 동일하게 놀이로 느끼도록 만드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또, 이 시기 아동들은 시시각각 성장하며 그들의 능력ㆍ적성ㆍ흥미ㆍ욕구ㆍ가치관 등도 수시로 변화하기에, 내 자녀가 놀이로 느끼던 공부법이 순식간에 무용지물이 되어 버릴 수도 있다. 우리가 ‘놀이식 업무’에 대해 논의하지 않는 것이 '업무'라는 활동 자체의 성격에서 기인하듯이 공부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공부 그 자체가 놀이가 될 수 없다. 단지 그 안에서 느낄 수 있는 부분적인 즐거움과 보람이 있을 뿐이다.
우리 할머니는 많은 곳에서 설명하고 있는 ‘공부 = 놀이’의 방식을 취하기보다는, 세상을 하나씩 이해시켜 주면서 자연스럽게 그 다음 것을 궁금하게 만드는 방법을 사용하셨다. 즉, 나로 하여금 궁금증이나 호기심의 해소가 즐거움과 보람 또는 성취감으로 이어질 수 있게 도와주셨던 것이다.
나는 할머니가 계속 바닥에 글을 쓰는 모습을 보다 “나도 써볼래, 할머니!”라는 말을 건넸다. 이렇듯 할머니는 내가 해야만 하는 것들을 내 눈높이에서 직접 행동으로 보여주심으로써 내가 스스로 해보고 싶다는 욕구를 느끼도록 만들어주셨다. 그것은 나에게 학습이었다기보다는, 할머니가 해내는 행동들을 나도 해보고 싶다는 단순한 욕구의 실현이었다. 어린 아이가 학습이나 공부라고 느낄 겨를조차 없이 하나씩 무언가를 가르치셨다. 그런 부분에서 할머니는 매우 대단했다.
이외에도 할머니는 내게 숫자를 알려주신 후에 이것이 생활에 어떻게 맞닿아 있는지 알려 주기 위해 직접 수퍼마켓에서 아이스크림을 사보게 한다든지, ‘무엇을 몇 개 가져와라.’와 같은 심부름은 모두 나에게 시키셨다. 또한 시간 개념을 가르쳐야겠다고 생각하셨을 때는 “아, 지금 몇시지?”, “일곱시에 밥 먹어야 겠다.”와 같이, 내가 ‘시(時)’와 시간에 대해 궁금해할 수밖에 없도록 의도적으로 계속해서 언급하셨다.
할머니표 비법의 핵심은, 내가 배움의 필요성을 스스로 느끼고 먼저 묻기 전에는 학습을 강요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을 배워볼까?”라며 권유하는 방법보다는 훨씬 복잡하고 인내심을 요하는 과정이었을 테지만, 궁금증을 유발하고 내가 배움의 욕구를 가지게 하는 데에는 훨씬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그야말로 진득함으로 만들어진 할머니의 교육방식이었다. 덕분에 나는 취학 전에 할머니와 함께 세상에 존재하는 인간들의 합의를 하나씩 익힐 수 있었다. 사랑으로 정으로, 아주 순하고 연하게 하나하나 알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