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태어나서 처음으로 어머니께 편지를 씁니다. 아마 이걸 보실 일은 없겠지만, 이렇게라도 하고 떠나야 제 마음이 가벼울 것 같습니다. 직접 드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짐작하셨나요? 혹시라도 지금쯤, 제가 찾아 오기를 기다리셨나요?
28년만에 다시 방문한 한국은 참 좋았습니다. 그동안 열심히 해 온 한글 공부 덕일까요, 아니면 세월에서 오는 여유일까요. 긴장도 어색함도 없이, 스무살적 처음 왔을었때와는 많이 다르게, 상상치도 못한 편안함까지 있었습니다.
인천공항을 나서며 눈으로 코로 느껴지는 바다, 스모그 반 안개 반의 흐릿한 다리 위에서, 저는 노래가사처럼 마법의 성으로 달려가는 기사였습니다. 성안에 갇힌 어머니를 구해내려는…?? 평생 꿈꾸어 온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즐거운 시작이었습니다. 여전히 철없는 바보지요? 어머니를 생각 할 때만큼은 아무 고민없이 그저 행복하고 싶습니다. 기억없는 어머니, 아버지 두 분 중, 어느 한 분은 이렇게 낙천적이셨을까요? 키우지 않았어도, 같이 살지 않았어도, 100% 유전으로만, 이런 성격을 꼭 빼다 박았다 믿어도 괜찮겠지요?
사실은 이미 오래전에, 그저 여행이다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아프리카도 가고 유럽도 가는데, 한국이라고 두번 못 갈 것 있나 하는 마음으로, 짧지만 간절함이 가득한, 또 하나의 해외 여행이라 다독이며 왔습니다. 호기심 반 체념 반… 그래야 실망이 적겠지요.
어머니, 대전 아시지요?
태어나서 두번째로, 제 의지로는 처음으로, 드디어 그 곳에 가보았습니다. 서류상 ‘본적’ 이 진짜 고향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제가 아는 몇 안되는 한국의 지명들 - 서울, 평양, 제주, 인천, 부산, 독도, 대전… 그 중에 가장 마음이 끌리는 곳은 역시 제가 발견되었다는 대전입니다. 물증도 증인도 없지만, 그래도 비교적 자세히, ‘대전시 서구 장안 1동 사랑 교회 앞 계단에서 발견’ 이라고 쓰여있으니, 설마 그게 다 교묘한 거짓말은 아니겠지요. 그 교회를 기억하십니까? 신자셨나요? 부근에 사셨나요? 아니면 다른 곳에서 낳아서 조금이라도 더 큰 도시인 대전에 와서 저를 그렇게… (버렸다는 말이 아직도 싫으니까… ‘내려 놓으셨다’ 라고 하는 게 낫겠지요?) 살그머니 벽돌 계단에 내려 놓으셨나요?
사실, 대전에서도 원하던 걸 찾지는 못했습니다. 오래전이라 전산화 되지 않아서 기록은 다 사라졌다고 하고, 처음 저를 검진했다는 병원도 이미 오래 전에 폐업했구요. 입양전까지 맡아주었다는 영아원 / 고아원은 다른 곳과 합쳐져 다른 곳으로 이전했습니다. 어느 재단에서 하는 그룹홈이 되었다고 해서 잠깐 들러는 봤지만, 저처럼 오래된 아이들의 문서는 없었습니다. 그 시절 저를 돌보아 주셨을 분들도 찾을 길이 없겠지요. 처음 미아 신고를 받았다는 경찰서에서도 담당자가 누구인지, 어디로 가야하는지, 저만큼이나 모르네요.
재작년쯤, 홀트에 제 한국 사진 한장을 문의 했었습니다. 편안한 옷차림에 저를 안고 있던 중년의 여성분에 대해서요. ‘위탁모’라고 부르더군요. 그 분의 이름과 계신 곳은 쉽게 찾았지만, 이미 고인이 되셨다 했습니다. 입양아가 하나둘이 아니었으니 저를 기억 못하시겠지만, 그래도 몇번이고 나를 안고, 먹이고, 재워주셨을 그 분을 뵈러 납골당에 갔었습니다. 저처럼 가끔 찾아오는 입양인들이 있다고 하네요. 같은 걸 찾는 사람들이겠지요. 별로 긴장되지 않는, 졸음 살살 오는 기분 좋은 드라이브였습니다.
생각보다 시내에서 멀지않은 한적한 외곽이었는데, 마치 대도시의 아파트 단지처럼 다닥다닥 쌓아놓은… 아마도 수백명, 수천명은 될 듯했습니다. 땅이 작아 이렇게 차곡차곡 쌓아두었겠죠? 처음보는 납골당의 모습에 적잖이 놀랐지만, 곧 작은 항아리 하나하나에 쓰여진 이름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혹시 이 중에 어머니, 아버지가 계실까… 한문이 섞여있어 무척 어려웠지만, 더듬더듬 한국어 글자들만 읽어 보았습니다. 저처럼 이 씨 성을 가진 사람의 유골함은 더 오래도록 꼼꼼히 살펴보았습니다. 저와 사진 속 얼굴도 비교해 보고, 출생연도도 계산해 가며, 혹시나 형제자매일까, 돌림자라는 것도 찾아봤지요.
제 위탁모이셨던 분은 천주교 묘지에 계시다가 납골당으로 이전했다고 했습니다. 종교인이셨나 봅니다. 잠시 잠깐, 제가 버려졌던 그 교회 (혹은 성당?) 과 관련있는 분일지도 모른다는 단순한 생각도 했습니다. 만약 어머니가 교인이고 위탁모도 그렇다면, 혹시라도 몇 다리 건너 서로 알고 지냈을까? 아는 사람의 아이라 나를 보살펴 주었을까? 행여 그렇다면 너무 쉬운 이야기가 되었겠죠? 꿈 같은, 행복한 꿈같은 가설입니다.
지도에서는 점 하나이던 대전이, 실제로는 발을 딛을 때 마다 점점 넓어집니다. 이 큰 도시에서, 이씨 성을 가진 사람은 몇명일까요? 70년 한해에 출생한 아가들은 몇명 일까요? 새로운 동네, 길거리, 건물… 4-50년 전의 대전 한복판, 어머니와 위탁모 두 분이 서로 아는 사람일 가능성은 없겠지요. 사실, 대전 시내를 다 뒤져도, 어머니를 아는 사람을 찾을 수는 없습니다. 왜냐구요? 저는, 제가 찾는 어머니가 누구인지, 누가 제 어머니인지, 모르니까요.
어머니, 이상한 보물찾기를 해보신적 있나요.
무엇을, 어디서, 어떻게 찾아야하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끝도 없는... 어쩌면 있는지 조차 확실치 않은 보물찾기… 저처럼, 누굴 찾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이름도, 얼굴도, 키도, 나이도 모르면서, 사람을 찾아보셨나요. 제가 지금 그렇게 당신을 찾고 있습니다. 낳아 준 사람이 있다는 것 하나만 사실인 채로, DNA 정보를 등록 해 놓고 기다립니다. 영영 오지않을 연락에 희망을 걸고, 이 나이가 되었습니다. 버릴 때, 메모 한장 넣어주시지 그러셨어요. 이름이라도, 사진이라도, 잘 살아라 한마디라도… 절대 찾지 말아라 부탁했어도 서운하지 않았을 겁니다, 사진 속 당신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면요.
누구신가요? 어디에 사셨고, 어떤 얼굴이셨나요? 제가 이제 50이니, 지금쯤 최소 60후반에서 최대 90정도 시겠지요. 60에서 90사이 아이를 낳아 본 한국 여성… 오차 범위가 너무 넓어 답답합니다. 미치겠습니다. 추측으로는, 제가 그다지 크지 않으니, 키가 작으셨을 거고, 피부는 약간 검으실 겁니다. 농사를 지으셨다면 손마디가 굵고, 굳은 살이 많으셨겠지요? 드라마에 나오는 동그란 아줌마 파마 머리를 하셨었나요. 한국 웹사이트에서, 그 시절에 흔하던 이름을 검색해 봤습니다. 숙자, 미자, 영자셨나요? 인선, 화선, 순선인가요? 정임이나 경복, 명희… 이런건 좀 화려한가요? 흔하다는 김씨, 이씨, 박씨 중 하나일수도 있고, 제 한국 이름이 ‘이광수’니까, 부모님이 주신 이름이라면 아버지가 ‘이씨’ 셨나요? 아니면 혹시 이것도 어머니 성이거나, 아니면 경찰서나 보호 시설에서 아무나가 지어준 가짜 이름인가요?
제가 태어난 곳은 정말 대전인지, 아니면 그냥, 발견된 곳이 대전일 뿐, 아무것도 믿을 게 없는 건지... 정말로 하늘색 이불에 싸여 대전의 한 교회 계단에서 발견된 목을 가누는 남자 아기... 딱 거기까지만 진실인가요? 제가 두르고 있었다던 이불, 시장 상품이라는 하늘색 아가 이불 말인데요, 당시에 버려지던 애들치고는 꽤 드문 경우라고 했습니다. 대부분 어른 옷이나 이불 홋청에 말아서 버렸다던데, 제 담요는 돈을 줘야 살 수 있는, 그 시절 시골에서는 흔치 않던 고급 ‘유아용품’ 이었다고 했습니다. 게다가 ‘발견 당시 생후 5-6개월 정도로 추정’ 이라는 걸로 보아, 아마 그전까지는 저를 직접, 혹은 가족 품에서 키우셨다는 얘기겠지요. 애기 이불을 살 만큼 아주 가난한 것도 아니었다면, 버려야 했던 다른 이유가 있었나요?
혹시, 저를 버린 사람이 어머니, 당신이셨나요? 생후 6개월 아가에게 더욱 매서웠을 한겨울, 새해 며칠 지나지 않은 1월에, 교회 앞 얼음장같은 계단에 저를 눕혀 두었어야만 했나요? 동 터 오는 어두운 골목 끝에 숨어 누군가 나를 안아 들고 사라질때까지, 숨죽여 울고 계셨겠지요. 하늘색 이불은 미안해서 제게 주신 마지막 선물이셨을까요, 아니면, 이후로 더이상 필요치 않다는, 아이를 더 낳지 않을 거라는, 혹은 낳지 못 할 거라는, 확신이 있으셨나요. 가난을 이유로, 주로 막내 아이를 버렸다고 들었습니다. 저도 어머니의 마지막 아이였나요? 그립고, 보고싶고, 미안한… 어리고 연약한 ‘막둥이’ 인가요.
어머니, 28년전 처음 한국에 왔었을 때에도, ‘아침마당’ 이라는 프로그램에 나갔었습니다. 매주 수요일에 <그 사람이 보고싶다> 라는 코너를 했었는데, 입양아는 제가 처음이라고 했습니다. 친누나처럼 정이 많아보이던 이금희 아나운서가 제 사연을 대신 읽어주며 눈물을 글썽이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짧은 준비 기간에 통역을 구할 수 없어 간신히 ‘이광수’ 이름 세 글자와 ‘어머니’ 라는 말만 반복하던 저는, 참 준비성 없고 의욕만 앞섰었습니다. 대한민국에 입양아가 나 하나인 것 처럼, 한국 사람들이 몇 백명뿐이라 여기저기 물어보면 금방 찾을거라 착각했을까요. 남들처럼, 방송 후 제보 전화가 쏟아지며 카메라 앞에서 엄마를 부둥켜 안고 통곡할 거다 자신했을까요. 스물 두살 어린 아이였던 제가 서울역 앞에서 뿌려댄 오천장의 전단지는, 어머니 계신 곳 근처에라도 날아들었나요.
무심히 시간만 흘러 이번에 한국 올 때 알아보니, 수요일의 그 코너는 진작에 폐지되었습니다. 대신 대전의 한 방송국에 있다는 어느 작가분이 제 이야기를 다시 한번 뱡송해 보고 싶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기대는 안하지만, 기쁘게 허락했습니다. 실제 입양 사정을 알리고 싶기고 했고, 지난 평창 올림픽에 유독 입양인들이 선수로 출전하면서 조금 덕을 볼 수 있을까하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방송에 나온다고 바로 찾아지지는 않지요. 갑작스레 입양인에 대한 대우가 좋아지거나, 혜택이 생기거나, 체계적인 방안이 만들어지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한국에서 내 이야기를 한번 더 할 수 있다는 흔치않은 기회에 성심성의껏 참여했습니다.
대전 방송국 뉴스룸에서의 짧은 인터뷰 내내, 별로 달라진것 없는 과거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는 정보, 남은 기록, 새로 발견된 것 하나도 없이. 전에 했던 이야기를 똑같이 반복했습니다 - 1971년 대전, 1월초, 하늘색 아가 이불, 교회 돌계단... 이름/ 생일 미상. 최초 검진한 의사가 대략 6개월 되었을거다 하여 생일은 1970년 8월15일, 광복절로 결정... 보육원 혹은 위탁모에 맡겨졌다가 미국으로 보내짐. 입양 당시 여권에는 어디에서, 누가 지었는지 모르지만, ‘이광수’ 라는 한국 이름이 찍혀 있었음… 이번에 방송을 하면서 알았습니다. 한국인으로서의 제 인생은 그게 다 였습니다. 더이상 보탤것도, 과장 할 것도 없이… 안간힘을 쓰고 늘려봐도, 슬프지만, 몇 줄 되지가 않습니다.
어머니, 대신 저는 다른곳에서 일생을 삽니다. 미국인으로서의 저는, Lee Herrick, 미국 대학의 영문과 교수입니다. 어린 시절 오랫동안, 외로움은 슬픔이었고, 슬픔은 곧 고통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나이가 먹으면서, 그 고통이 저를 존재하게 하는 힘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더이상 서러운 이방인이 아니라, 두개의 조국을 가진 운좋은 사나이입니다. 길러주신 어머니와 낳아주신 어머니, 두분, 두 가족이 있습니다. 캘리포니아의 부드러운 영어와, 토종 한국인의 외모가 공존합니다. 올림픽을 보며 미국과 한국, 어느 나라를 응원할지 망설이는 귀여운 갈등도 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제, 시를 씁니다. 양부모님의 사랑과 타고난 한국 머리로, 어려움없이 원하는만큼 공부했고, 와인과 노을의 나라 캘리포니아에서 문학을 즐깁니다. 친부모가 버렸다는 슬픔 대신, 누군가에게 좋은 부모가 되겠다는 마음으로 삽니다. 아이를 입양했습니다. 중학생인 제 딸은, 눈이 안보여 특수 교육이 필요하지만, 아주 현명하고 사려깊은 아이입니다. 나를 버린 어머니를 용서하려, 어머니의 죄를 대신 갚으려 시작한 일이었는데, 어느새 아이는 나를 살려주는, 내 삶의 긴 호흡이 되었습니다.
기쁘셨겠지요? 아버지이자 교수이며, 유명 시인인 저를 실제 보셨다면, 소식을 들으셨다면, 진심으로 기쁘셨겠지요? 제 사진이 실렸던 포스터, 문학 잡지, 그동안 출간했던 시집들… 모두를 작은 박스에 넣어 모아두었습니다. 학창시절에 받은 상장과 트로피, 일기장과 졸업 앨범까지, 어머니를 위해 모두 모아두었습니다. 참 불쌍하신 어머니... 이런 저를 보실 수가 없네요. 자랑스러우셨겠지요? 대견하다 칭찬하셨을 겁니다. 험한 삶 사셨을 어머니께, 큰 보람이 되었을 겁니다. 지금의 저를 알고 지내셨다면, 저를 버린 미안함이 싹 가실만큼, 행복해 하셨을 거라고 믿고 싶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돌아가실때까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까지, 저는 계속 어머니를 찾으려 합니다. 저를 보여드리려 합니다.
어머니, 저는 지금 뿌리의 집에 있습니다. 서울 종로의 북쪽 끝, 인사동을 조금 지난 경복 고등학교 앞 입니다. 골목골목 좁은 길로 들어가 조용한 곳에 자리잡은 해외 입양인을 위한 숙소입니다. 서울에서 지내는 동안 여기 묵었습니다. 자그마한 흙마당에 몇 뿌리 자라고 있는 꽃나무가 '먼 나라'에 와있음을 상기시킵니다. 야생 들꽃처럼 생긴 보라색 앵초와 조금 큰 놈은 접시꽃이라고 했습니다. 어울릴 듯 안어울릴듯, 키 차이도 나고 꽃 크기도 다른 이국적인 자태에, 사진을 연거푸 찍어댑니다. 정감있고 신기합니다. 사막이라 나무는 좀 있지만 꽃은 많지않은 캘리포니아 저희 집 마당에 심어볼까하고 씨앗을 샀습니다. 혹시라도 어떤게 잘 자랄지 아닐지 몰라, 사진만 보고 백일홍과 철쭉도 한 팩씩 집어들었습니다. 곧 저희집 마당은 한국 꽃밭이 될 것 같습니다.
이곳은 해외 입양에 대한 정보가 많아 힘들게 예약하고 옵니다. 자원 봉사자 분들이 여러 나라에서 온 입양인들을 도와주십니다. 시멘트를 덧바른 돌 계단 몇칸을 올라가면, 가슴 설레게 예쁜 둥근 창문으로 까만 머리의 사람들이 보입니다. 누군가에게는 어설픈 영어, 누군가에게는 처음 듣는 외국어, 그리고, 그곳을 찾는 모두에게 아주 많이 어려운 한국어… 훗날을 위해 연락처를 교환하며 친구를, 형제를 만들어 갑니다. 작은 침대와 서랍장 하나만으로도 꽉 차는 작은 방이지만, 어차피 늘어놓을 짐도 많지 않아 지낼만 합니다. 매일 몇명씩, 들어오고 나갑니다. 걸어 들어 온 그대로, 성과 하나 없이 가방 두개 달랑 들고 떠납니다. 우리는 그렇게, 만남보다 헤어짐이 익숙한 사람들인가 봅니다.
어머니,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인사동 큰 길가에서 헌혈 버스를 보았습니다. 미국에서 많이 했듯이, 헌혈을 했습니다. 여기에서도, 건강한 제 피가 깨끗한 튜브를 타고 누군가의 생명을 살리겠지요. 몇년 전 미국에서, 한 가정의 아버지에게 제 골수를 기증했습니다. 제가 죽으면 장기를 기증하는 서약도 했습니다. 훗날 누구라도 또 제 도움이 필요하다면 반드시 도울 겁니다. 오직 어머니를 위해서요...
만약 누군가, 혹시라도 나와 어머니를 더럽다, 부정하다 욕했다면, 혹은, 나를 버린 것 때문에 인간의 도리를 저버렸다 비난했다면, 다 잊고 당당하십시오. 어머니의 죄를, 그 시절 무력함을, 제가 씻고 있습니다. 어머니께 아무 도움 되지 못했던 그 작은 고깃 덩어리를 나누어 다른 어머니의 자식을, 누군가의 가족을, 얼굴 모를 환자를 살려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신께 어머니의 죄를 용서받을 방법이 이것밖에 없습니다. 무슨 이유로 버렸는지 모르지만, 그때 주신 건강한 피와 살로, 뜨거운 심장과 내 진심으로, 다른 이의 생명을 지킵니다. 숨기지 마십시오. 당신의 아들은 더이상 업보가 아닙니다. 저는 이제, 어머니의 치부가 아닌, 자랑이어야 합니다.
우습지만, 가끔 이런 생각도 합니다. 내 피와 살을 나눠가진 사람들은 유전자가 변할까? 혹시라도 나중에 나와 친인척으로 나올만큼 내유전자 그들의 몸속에 남게 되나.. 만약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저는 아직 누구에게도, 아무것도 이식 받지 않았습니다. 앞으로도 평생 받지 않을 겁니다. 수혈도, 이식도 없이, 어머니가 주신 유전자 그대로 살겠습니다. 그래야만 나중에라도, 천만분의 일, 만만분의 일이라도 당신이 나를 찾길 원할 때, 내가 당신의 분신이라는 의학적 근거가 될 테니까요.
어머니, 어떻게 지냈나요? 나를 닮았을 동생들, 혹은 형 누나들을 보면서 나를 추억하셨나요. 미안하고 슬퍼서, 울고만 계셨나요. 한번쯤, 후회 한 적도 있었을까요? 괜찮습니다. 날 보내고 행복해졌다해도 화나지 않습니다. 기억해 준 시간이 고맙고, 마음으로만 내 행복을 빌었을 당신이 안쓰럽습니다. 병에 걸려 죽었다면, 갑작스런 사고로 의식조차 없었다면, 돌봐주지 못해 내가 미안합니다. 밥 한숟가락을 물에 불려 나눠 먹여야 할만큼 가난했다면, 저를 보내신 건 잘 하신 겁니다. 그렇게해서 다른 아이들이 살아 날 수 있었다면, 현명하셨습니다. 저는 잘 살았습니다. 알고 계셨나봅니다. 그 아이들 중, 제가, 제일 잘 할 거라는 걸, 부모 복이 많은 아이라는 걸, 분명 아셨을 겁니다. 괴로워 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생명을 주셨고, 양부모님은 운명을 주셨습니다.
어머니, 처음으로 당신을 위한 시를 씁니다. 오래 전 사춘기처럼 찾아 온 뿌리 찾기 열병에 잠시 아프던 시절, 나를 버렸던 하늘 색 아가 이불 속으로 돌아가 온몸으로 당신을 찾던, 그 절망을 기억 합니다. 만나자 강요할 수 없어 처분만을 기다리는 죄인의 심정으로, 혹시라도 저세상 사람이 되었을까 두려운 마음으로, 어머니, 나는 아직도 당신이 보고 싶습니다. 내 얼굴, 키, 손가락 발가락 어딘가에 당신과 똑 닮은 내가 있습니다. 당신 몰래 그렇게 당신을 꼭 안고 살아갑니다. 당신이 살고 있는, 혹은 살았던 이 곳 한국 땅에, 저의 흔적을 남깁니다. 고향이라 더 슬프고, 핏줄이라 더 아픈, 입양인들의 사연이 가득한 뿌리의 집 방명록에, 저의 시를 남깁니다. 여러 언어에 혼란스러워도, 단 한 단어, 모두가 품고 있던 말 - 어머니. 내가 당신을 사랑하듯이, 당신도 당신을 아끼고 사랑했으면 좋겠습니다. 내게 미안해 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늘, 신보다 가까이에서 나와 살아 온, 나의 생명줄입니다. 사랑합니다.
< 어머니께 >
어머니, 당신은 가난 했나요
아파트 붐으로 땅 투기에 열 올리던 시절,
돈 될만한 논 한평이 없어 허드렛 일로 하루를 이어갔나요
젖먹이 아가 하나 돌보지 못해 포기해야 했나요
앞만 보고 달리던 1970년 대한민국의 뒷자락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먹이 사슬의 맨 아래,
그 가여운, 빈민이셨나요
어머니, 당신은 부도덕 했나요
거부할 수 없는 욕정으로, 혹은 한번의 실수로,
정숙을 강요받던 한국 여인이 해서는 안 될 잘못을 저질렀나요
누구도 원치않는 아이였기에 버려야 했나요
사람들의 눈총과 손가락질이 두려워,
불러오는 배를 겹겹이 가리며 살쪘다 부었다
없는 척, 아닌 척, 숨기셨나요
어머니, 당신은 아팠습니까
알 수 없는 병명으로 꺼져가던 목숨을,
함께 감당해줄 인연이 없어 홀로 준비해야 했나요
같이 죽을 수 없어 보내야 했나요
찾는 이 없는 쓸쓸한 문간방 다 식은 아랫목에서
홀로 남겨질 어린 생명을 지켜주십사
교회 계단에 눕혀놓고 돌아섰나요
어머니, 당신은 불쌍한 사람
당당하지 못해 많은 것을 숨겨온 인생,
차라리 다 잊고 새 삶을 찾았다면 좋겠습니다.
필연으로 스치며 눈물로 매달려도,
마음에 없는 독설을 퍼부어도,
지금처럼 혼자 가슴으로만 울었으면 좋겠습니다.
여전히 나를, 그리워했으면 좋겠습니다
어머니, 나는 행복한 사람
무겁고 우울한 삶에 버거웠어도,
간절한 기도로 재회를 꿈 꿉니다.
천국에서 만나 술 한 잔 하자 위로합니다.
날 버린 50년, 이제쯤 세상을 떠났다 해도,
눈, 코, 입 어디엔가 남아있을 당신과
나는 늘, 함께 합니다
이광수 드림